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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은상은 알바연대에 가입하라

부와 가난을 적나라하게 대립시키는 <상속자들>, 현실의 가난한 자는 쉬는 시간 제대로 챙기고 주휴수당 붙는지를 확인하길
등록 2013-11-26 16:25 수정 2020-05-03 04:27
최근작 중 만큼 부와 가난을 적나라하게 대립시키는 드라마는 없다. 사랑 안에서 부와 가난의 통합이라는 아름다운 이상을 추구한다.SBS 제공

최근작 중 만큼 부와 가난을 적나라하게 대립시키는 드라마는 없다. 사랑 안에서 부와 가난의 통합이라는 아름다운 이상을 추구한다.SBS 제공

의 송병철은 맨날 당한다. ‘정 여사’에서는 두 모녀를 ‘어서 옵쇼’로 맞았다가 막무가내 “바꿔줘”에 당하고는 “부자들이 더한다니까”로 마무리한다. ‘씨스타29’에서는 “아홉수라 그”런 두 언니의 희생양이다. 두 언니는 송병철에게 끈적한 눈길을 주고 유혹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성희롱으로밖에 안 보인다. ‘편하게 있어’에서는 직장 상사가 회식 뒤 3차를 하자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직장 상사는 회를 뜨러 갔다가 고양이한테 할퀴어서 들어오고 상사의 부인은 다 들리는 말로 바가지를 긁고 90살 먹은 어른이 밥을 지어준다며 쌀을 다 흩으며 걸으니, 하나도 안 편하다. 왜 송병철은 당하기만 할까? 괴롭히고 싶은 관상? 잘생겨서? ‘을’이어서다. 송병철은 서비스직 노동자이고 감정노동자이고 직장 부하직원이다.

“나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드라마 (SBS, 수·목 밤 10시)에서 차은상(박신혜)이 송병철이다. 차은상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나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다. 거절해도 거절해도 밀고 들어온다. 미국에서 만난 남자(김탄 역 이민호)는 묻는 말이 이렇다. “나 너 좋아하는 거니?” “나 너 보고 싶었던 거니?” 그런 뒤에는 명령이다. ‘감정 의문형’에 이어 ‘감정 명령형’이다. “이제부터 나 좋아하도록 해. 되도록이면 진심으로.” 또 밀고 들어오는 남자(최영도 역 김우빈)가 한 명 더 있어서 이 학생에게도 주로 쓰는 말이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다. 공부 방해당하고 알바 방해받고 키스당한다. 그런데 감정 명령형대로 된다. 14회(11월21일)에서 이 밀고 들어오는 사랑은 상호 관계로 바뀌었다. 왜 차은상은 항상 당하는 걸까. 예뻐서? 사배자(사회적 배려자)라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라서? 가난해서다. 가난하니 자동으로 을이 된다.

최근작 중 만큼 부와 가난을 적나라하게 대립시키는 드라마는 없다. 다른 말로 본격 ‘신데렐라 드라마’다. 멜로드라마의 전형적 요소를 아낌없이 들여왔다. 우연, 양극성(대칭), 삼각관계(오명환, )가 극명하게 보인다. 양극성의 표출은 빈부 격차를 통해서다. 가난과 부는 로스앤젤레스(LA)의 호화 빌라에서, 커피체인점 앞 인도에서, 호텔 로비에서, 사립학교의 식당에서 언제나 마주 보고 서 있다. 주인공 남녀가 주로 가난과 부로 마주 보지만, 여자와 여자이기도 하고 남자와 남자이기도 하고 과거의 남자와 여자이기도 하다. 가난과 부가 대립하는 주 무대는 사립고등학교다. 가난한 은상은 탄의 아버지인 제국그룹 회장의 뜻에 따라 탄이 입학한 제국고에 사배자 전형으로 들어간다. “탄이랑 가까이하면 왜 안 되는지 적어도 100명의 입을 통해서 깨닫게 될 테니까”라는 이유에서다.

멜로드라마의 전형적 요소에는 하나가 더 있다. ‘약자를 위한 만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 약자는 남자다. 재벌 남자를 상처 있는 남자로 설정했다. 김탄은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함께한, 통신사를 제외하고는 문어발처럼 뻗은 계열사를 가진 제국그룹의 둘째아들이지만, 네이버 실검(실시간 검색)으로 오르는 ‘서자’라는 복잡한 관계의 지형도에 있다. 호적상 엄마와 낳아준 엄마가 다르다. 형은 또 엄마가 다르다. 상처는 인문학적 깊이를 가정한다. 김은숙 작가의 전작 의 김주원(현빈)처럼 김탄도 시집을 읽는다. 에세이를 쓴다. 천박한 자본주의에 불어넣은 시적 정의? 그보다는 ‘상속자들’이라는 제목 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성장담’을 완성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이러니 가난은 한없이 초라하다. 가난에 주어진 ‘배려’는 ‘사배자 전형’의 ‘배려’ 수준이다. 드라마를 지배하는 정서가 그렇다. 재벌집 가사도우미 어머니는 “내가 식당 일을 안 해봤어? 청소를 안 해봤어? 말 못하는 날 이렇게 일하게 하는 곳도 여기뿐이야”라고 말한다.

‘청춘’이 만든 틈

에서 이미 확고한 부의 세습이 이뤄진 세계에서 빈자와 부자의 사랑이 완성되려면 ‘환상’이 동원돼야 했듯이, 에서는 ‘고등학생’이어야 했다. 김탄의 아버지는 비서실장에게 “차은상 유학 준비해. 청춘이란 요소를 감안하지 못했어”라고 말한다. ‘청춘’이 틈을 만든 것이다. 15회부터는 빈부 격차를 봉합한 고등학교를 벗어나 어른을 향한 청춘의 반격이 시작된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부자”였던 유라헬(김지원)조차 깜짝 놀랄 “미친 듯이 주식이 뛸 때 약혼 정리해”라는 세계로 들어간다. 이것 또한 왕관을 쓰는 성장담을 완성시키며 부자들의 화합으로 끝날 것이다.

멜로드라마는 그 태생부터 “그 문화적 지위로 보나 관객의 계급으로 보나 최하 등급에 속한 오락 형식”(벤 싱어, )이다. 부자들이 이 드라마를 볼 리 만무다. 가난한 사람만이 로또도 사고 드라마도 본다. ‘청춘’의 요소를 감안한다면, 현실의 차은상은 알바연대에 가입하는 게 낫겠다. 쉬는 시간 제대로 챙기고, 주휴수당 붙는지도 확인하라. 더불어 엄마가 취직해 있을 뿐인데, 포도주잔을 들고 부엌에 오면서 “아줌마” 했다가 급하면 “은상아”라고 부르는 고용주에게, 노동에 대한 보상을 구하길.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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