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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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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 입은 테러리스트

청소년들이 파국의 주체로 등장하는 영화 <화이> <명왕성>,팬시 상품 같은 환락의 이미지로 소비되는 TV 드라마 <상속자들>
등록 2013-11-08 15:10 수정 2020-05-03 04:27
최근 영화와 TV 드라마에서 종전과 다른 캐릭터의 10대들이 눈에 띈다. 영화에서는 성장이 아닌 파괴와 자멸, TV에서는 소비와 환락의 주체로 소환된다.쇼박스 제공

최근 영화와 TV 드라마에서 종전과 다른 캐릭터의 10대들이 눈에 띈다. 영화에서는 성장이 아닌 파괴와 자멸, TV에서는 소비와 환락의 주체로 소환된다.쇼박스 제공

최근 한국 영화에서 파국적 결말이 늘고 있다. 등 대중성을 전면에 내세운 대작들도 파국적 결말을 취한다. 더 기이한 경향은 청소년들이 파국의 주체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그렇다. 파국적 결말 속에 교복 입은 테러리스트들이 출몰한다.

자본과 권력을 내면화한 ‘비관’ 그리고 ‘자폭’

에서 5명의 범죄자를 아버지로 둔 소년은 자신이 선한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닫고 나쁜 아버지들을 다 죽여버린다. 그런데 지금껏 나를 길러주고, 여전히 내가 속한 세계를 지배하는 아버지를 다 죽인다는 것이 쉬울까. 이는 현실 논리가 아닌 신화적 결단이다. 는 신화적 텍스트로서, 세계를 절멸시키는 신적 폭력을 보여준다. 소년의 친부가 세계의 악 앞에서 죄 없이 고통받으면서도 용서와 기도로 간구하는 기독교적 해법을 보여주었다면, 소년은 일체의 주저함 없이 다 죽여버리는 유대교적 메시아주의를 보여준다. 마지막에 소년은 단독자가 되어, 아버지들을 지배하던 악의 수장까지 명쾌하게 쏘아 죽인다. 는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나쁜 아버지들이며, 그런 세계를 끝장낼 주체는 20대도 아닌 10대라는 급진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은 명문 사립고 상위권에서 일어나는 추악한 경쟁과 왕따를 그린 학원물이다. 주인공은 가해자들을 인질로 잡고, 자신이 만든 폭탄으로 학교를 날려버린다. 에서 경쟁과 왕따의 피해자였던 원귀가 학교를 뒤흔들지만, 마지막 순간 “내가 잘할게”라는 말로 파국이 저지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인 결말이다. 에서 아이들은 학교라는 억압 기구의 피해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본과 권력을 내면화했다. 주인공은 더 이상 봉합이 불가능하다는 도저한 비관적 인식으로 자폭해버린다.

(11월7일 개봉)에서 시골 학교로 전학 간 소년은 매혹적인 왕따 소녀를 둘러싼 추문을 접하고, 추문과 관계된 이들을 죽여버린다. 그동안 여고생이 성적 추문에 휩싸이는 영화는 많았지만, 남자 고등학생이 응징자로 나서 살인과 사체 유기를 벌이는 영화는 드물었다. 는 학원물 속에 갇혀 있던 청소년의 폭력을 과감히 끌어낸다. 는 기존 성장물이 지니는 감정과 서사의 수위를 훌쩍 넘어선다. 성장이 아닌 파괴와 자멸로 치닫는 결말을 통해 더 이상 성장이나 치유가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다.

(11월6일 개봉)은 교복 입은 킬러의 활극을 거리낌 없이 즐기기 위해 간첩 모티브를 차용한다. 남파 간첩인 소년은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살면서 임무를 받으면 냉혹한 킬러로 변신한다. 에서도 고등학생 간첩이 조연으로 등장하며, 북한 내 권력다툼으로 간첩들이 자멸하는 서사를 전개한다. 은 가 지닌 코믹과 동성애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아이돌 출신의 고등학생 간첩을 전면에 내세워 교복 입은 킬러의 총격을 탐닉한다.

소비하지 말고 진지하게 주목하라

영화 속 청소년이 파국의 주체가 되는 것과 달리, TV 속 청소년들은 환락의 주체로 소환된다. 1990년대를 풍미하던 등 대학생들의 연애를 담은 캠퍼스물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 30%에 불과하던 대학 진학률이 80%로 높아지면서, 이제 대학생은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게토화됐던 대학 문화도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 대학생들은 파편화돼 대학생이란 이름으로 묶일 이유도 없어졌다. 반면 청소년들은 2008년 촛불 이후 새로운 담론의 주체로 부상하면서 대중문화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요즘 TV는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들의 연애를 담는다. 에서 고등학생은 성인과 연애하며, 에선 상류층 청소년들끼리 성인 뺨치는 연애와 소비를 즐긴다. TV 속 고등학생들의 연애가 전면화된 것은 등 일본 하위문화의 수입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아이돌 중심으로 방송계가 재편되면서, 아이돌이 다니는 예고를 그렸던 시리즈를 거쳐 TV 속 청소년들은 현실과 관계없이 소비되는 팬시 상품 같은 환락의 이미지를 얻게 됐다.

청소년들이 영화와 TV에서 파국과 환락의 주체로 소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실의 청소년은 과거 청소년과 달리, 이미 주체화의 과정을 밟고 있다. 특목고와 자사고의 난립으로 현재 청소년들은 고교 진학시 자신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안다. 고3으로 대표되던 입시 경쟁은 중3으로 내려왔다. 수시모집과 입학사정관제가 요구하는 자기소개서는 고등학생조차 각자 스펙을 관리하는 주체가 되도록 압박한다. 대학을 간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는 것도 안다. 학교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획일적인 규율은 여전하다. 청소년은 아이돌 문화로 대변되는 대중문화의 막강한 소비세력이자, 암담한 세계의 밑바닥을 가장 처연하게 응시하며 좌우 어느 쪽으로든 가장 급진화되기 쉬운 담론의 주체다. 대중문화가 청소년들을 소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진지하게 주목해야 할 이유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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