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전인권이 주찬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4살 때부터 무대에 섰고 여러 악기를 다루는 천재형 뮤지션이고, 기타 치고 드럼 치고 노래하고 노래 만들고… 드럼을 맡고 있는 주찬권입니다.”
‘세션’으로 참여했지만 ‘세션맨’이 아니었다
그 ‘천재형 뮤지션’이 지난 10월20일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지병도 없었고 특별한 예후도 없이 집에서 한 번 쓰러지더니 그냥 바람처럼 가버렸다. 들국화의 새 앨범 녹음이 거의 끝나고 막바지 작업만 남은 시점이다. 이 앨범이 얼마나 각별한지는 들국화의 주축 멤버들이 스튜디오에 모인 것이 ‘사반세기’가 지났다는 말로 설명을 대신한다.
주찬권이 들국화의 그 기념비적인 1집 앨범이 나왔을 때 그의 얼굴은 표지에 등장하지 않았고 ‘세션’으로만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오랜 기간을 기다린 들국화의 새 앨범 표지에는 그의 얼굴이 등장할지 몰라도 그 이름 앞에는 ‘고’(故)라는 글자를 붙여야 한다. 그래서, 더 원통하고 억울하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고인의 죽음이야 슬픈 일이지만, 드러머가 박자 맞춰서 장단을 두드리면 되는 거지 그리 중요하냐고…. 혹은 들국화에서 전인권의 보컬과 최성원의 작곡이 핵심이고 나머지는 외부 세션으로 때울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이런 말에 대해 밴드 음악을 모르는 무지한 이야기라고 핀잔을 주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주찬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드럼을 치는 들국화의 음악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굳이 상상하고 싶은 사람은 들국화의 정규 앨범이 나오기 전 라는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된 노래 이나 의 초기 버전을 들어보기 바란다. 저 버전들도 나쁘지는 않지만 무언가 부족하고 허전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말하자면 주찬권은, ‘록 스피릿’은 있었지만 이를 구현할 수단인 드럼과 리드기타를 찾지 못했던 들국화의 부족한 퍼즐을 맞춘 소중한 존재였다. 주찬권이 스틱을 쥐고 북과 심벌즈를 두드리고, 소싯적 그에게 기타를 배운 최구희가 피크를 쥐고 기타 줄을 울려대면서, 그 정신은 온전한 신체로 주조됐다. 그가 ‘세션’으로 참여했지만 ‘세션맨’이 아니었다는 점은 들국화의 앨범을 당시 나온 다른 앨범들과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주찬권의 북소리는 다른 사람이 낼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소리였다.
최근 들국화의 공연 포스터에서 주찬권은 전인권과 최성원의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무대에서 그는 드럼 세트가 놓인 자리에 앉아 앞에 자리한 전인권과 최성원의 모습을 뒤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 가운데’가 주찬권의 자리였다. 몇 발짝 뒤에서 전체의 중심을 잡아주는 존재가 어떻게 손쉽게 대체될 수 있겠는가.
들국화가 주찬권의 전부도 아니다. 주찬권은 솔로로서 6종의 앨범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4집부터 6집까지의 앨범들은 들어본 사람이 많지 않지만, 들어본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모든 곡을 혼자 작곡하고, 모든 악기를 혼자 연주하고, 노래까지 불렀다는 사실만 놀라운 게 아니다. 그의 작품은 ‘음악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결과물이었다. 음악 말고 다른 것에도 관심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다. 경기도 성남의 허름한 지하실에 있던 그의 작업실이자 연습실인 라이브 클럽을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았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경제적 곤경에도 불구하고 그가 음악 현장에서 꿋꿋이 버텨주지 않았다면 들국화가 재결성될 수 있었을까.
다시 듣고 싶은 “세상은 변해가도…”고인은 말주변이 지독히 없었다. 10년 전쯤 그와 인터뷰를 한 뒤 그걸 글로 옮기는 일은 지독히 힘들었다. 그렇지만 내게 그 인터뷰는 그 누구와의 인터뷰보다 진한 감동을 주었다. 음악이란 것이 명징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운 시간이었다. 몇 달 전 공연을 앞두고 대기실을 찾았을 때 나는 그가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그는 손으로 장단을 맞추거나 자신이 맡은 코러스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수백 번 연주했을 곡인데도 말이다.
누군가 나에게 “들국화에 대한 애증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사실 나의 ‘증’은 그가 말한 것과는 조금 다른 데 있었다. 이 형들이 한데 모여 가끔씩 앨범 하나를 만들어주기 바랐지만, 그 기대가 번번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이유를 이해하면서도 한 명의 팬으로서 그 기대를 쉽게 포기하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그 기대가 실현되려는 찰나에 그가 홀연히 가버렸다.
그래서 다시 주찬권의 영정 사진을 쳐다보았다. 특유의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는 “롹, 롹, 롹이 필요해”라고 소리치는 듯하다. 공연장에서 멤버 소개를 받을 때마다 맨손으로 심벌즈를 ‘팍, 팍, 팍’ 내려치던 그 모습으로 말이다. 그 모습에서 보듯 그는 언제나 당당했다. 그의 죽음이 가슴 아픈 것은 가난한 악사(樂士) 한 명의 육신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음악으로 당당했던 인물 하나를 이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해가도 난 또 여기에 너와 함께 있네”라는 말을 이제는 육성으로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현준 대중음악평론가·성공회대 교수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명태균, 윤 부부 ‘아크로비스타 이웃’ 함성득 교수 거쳐 김건희 만나
이 절경이 한국에…더 추워지기 전, 가봄 직한 여행 후보지 3곳
버려진 ‘덕분’에 드러난 죽음 ‘암장’...몇 명이 죽는지 아무도 모른다
[단독] ‘최재해 탄핵 비판’ 연서명 강행 감사원, 내부 반발로 무산
한동훈의 ‘김건희 꽃잎점’ 특검 한다, 안 한다, 한다, 안 한…
미래한국연구소 각서 공개 “김건희 돈 받아 6천만원 변제”
예산안 4.1조 삭감에 “국정마비 온다”는 당정…야당 “합당한 감액”
초유의 야당 단독 ‘감액 예산안’…본회의 앞두고 날 선 대치
매주 한 건 ‘유상증자 폭탄’…“이래서 한국 증시를 떠난다”
숲 여행도 하고 족욕도 하고…당일치기 기차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