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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영화, 10번의 금기를 넘다

장애인, 병역거부자, 노인 이야기 담은 인권위의 10번째 인권영화 <어떤 시선>… 인권위 관계자와 영화 제작진의 헌신
등록 2013-11-02 15:23 수정 2020-05-03 04:27

올해의 인권영화는 도전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만든 2013년 인권영화 은 장애인,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노인 이야기를 담았다. 인권위가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 도입 권고안을 낸 지 10년 만에 인권영화는 비로소 병역거부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지구촌 초대의 마이너리티 ‘노인’은 어떻게 다뤄야 좋을지 고민이 많았을 주제다. 이렇게 고심이 필요한 주제가 올해의 인권영화제에 담겼다. 은 영화로 옮기기 어려운 주제를 노인과 아이, 아들과 엄마, 친구와 친구의 관계를 통해 풀어간다.

신체적 장애보다 어려운 ‘마음의 핸디캡’

을 연출한 박정범 감독이 만든 는 중학생들의 이야기다. 뇌병변 장애를 가진 두한(임성철)과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철웅(김한주)은 학교에서 짝이다. 철웅은 선생님도 알아듣지 못하는 두한의 말을 알아듣고 다른 이들에게 ‘통역’한다. 두한을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반항하다 매타작도 당한다. 그러나 철웅은 실수를 저지른다. 가난한 철웅은 잘사는 두한의 집에 놀러 갔다가 물건에 대한 유혹을 이기지 못한다. 이런 철웅의 실수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는 재정의된다. 두한은 도움을 받기만 하는 친구가 아니라 이들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는 사춘기 소년들의 성장담을 담은 영화다. 박 감독은 를 “중학교 시절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영화”라고 말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신체적 장애보다 더 극복하기 어려운 ‘마음의 핸디캡’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신아가·이상철 감독이 공동 연출한 은 유쾌한 소동극이다. 영화에 나오는 “오빠는 풍각쟁이야~” 하는 흘러간 옛 노래의 가사가 오랜 여운을 남긴다. 독거노인인 봉구(이영석)씨는 생계를 위해 실버 택배기사로 일한다. 유일한 희망은 로또에 당첨돼 미국에서 소식이 끊긴 딸을 만나고 손자를 보는 것이다. 로또를 사던 어느 아침, 유치원 버스를 타지 않은 행운(황재원)을 보고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의 행운 ‘배달’은 도시에 가득한 암초에 부딪힌다. 봉구씨가 행운을 잘 데려다주려고 애쓸수록 그는 아이를 잘 납치한 사람이 돼버린다. 납치의 결정적 증거가 되는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녹화 영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사실을 일깨운다. 그런 사람이니까 그랬을 거야, 정황의 믿음이 얼마나 차별적 인식에 근거한 것인지 보여준다. 하루의 동행을 통해 아이와 노인은 유사 가족 같은 관계를 맺는데, 감독들은 을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편견과 폭력에 대한 의문과 뒤집기

을 만든 민용근 감독의 은 얼음이 낀 한강에 돌을 던지는 청년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자전거를 타는 청년 선재(김동현)는 착실한 아들이다. 낮에는 카센터에서 일하고 밤이면 미용실을 하는 엄마와 저녁을 먹는다. 엄마(길해연)에게 아들은 세계의 전부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 다른 가족과 떨어져 살기를 택할 만큼 아들은 소중하다. 엄마와 친구처럼 지내는 선재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다. 휴학을 하고 영장이 나왔지만, 선재는 군대에 갈 마음이 없다. 엄마는 모르는 선재의 신앙 때문이다. 선재의 대사, “엄마를 어떻게 이겨”와 “나 도망치고 싶지 않아” 사이에서 청년은 갈등한다. 엄마를 이기고 싶지 않지만, 군대에 가는 것은 선재에게 자신의 존재에서 도망치는 일이다. 이렇게 은 아픈 기억을 가진 엄마와 엄마를 다시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 아들의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 병역거부자의 고민을 풀어가는 (왼쪽), 노인과 아이의 동행이 유괴극으로 오인되는 과정을 통해 노인 문제를 그린 . 10번째 인권영화 에 담긴 단편들이다.영화사 진진 제공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 병역거부자의 고민을 풀어가는 (왼쪽), 노인과 아이의 동행이 유괴극으로 오인되는 과정을 통해 노인 문제를 그린 . 10번째 인권영화 에 담긴 단편들이다.영화사 진진 제공

이것은 아직도 한 해 700명이 겪는 고통이다.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일은 생각을 바꾸는 과정이었다. 민용근 감독은 “특정 종교의 이상한 교리에 휩쓸린 사람이거나, 입대를 피하려는 비겁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선입견이 내게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며 “막연한 거부감이 얼마나 많은 편견으로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됐다”고 돌이켰다. 영화의 제목이 인 이유는 “꽁꽁 얼어붙은 얼음강이 엄마와 아들을 둘러싼 세상 같기 때문”이다. 인권위 영화는 아니었지만, 병역거부자를 다룬 신동일 감독의 영화 (2006)에서 주인공을 했던 강지환은 이후 배우로 널리 알려졌다. 에서 처음 연기를 한다는 선재 역의 김동현도 이런 가능성을 보인다.

은 10번째 인권영화다. 2002년 으로 시작한 인권영화 프로젝트가 10년을 넘어 10번째 영화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 이는 많지 않았다. 국가기관이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낯설고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차별은 눈에 잘 보이지 않아서 영상에 담기도 어렵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짐작을 깨고 인권영화는 10번째로 이어졌다. 이제는 다른 나라 인권위가 벤치마킹하는 대상이 되었다. 내년 2월에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지난해 개봉한 인권영화 이 한국 대표로 출품된다. 그만큼 인권영화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담으려 애써왔다.

극영화뿐 아니라 때로는 애니메이션으로, 단편영화뿐 아니라 때로는 장편으로 인권영화는 만들어졌다. 차별에 담긴 편견, 시선에 묻은 폭력에 대한 의문과 뒤집기, 인권영화가 아니었으면 다루지 못했을 주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장애인·성소수자·이주노동자·비정규직 같은 주제뿐 아니라 외모·나이 차별 등 다양한 주제들이 인권영화 44편에 담겼다. 인권영화의 주제 선택은 금기를 넘어서는 과정이었다. 2005년 은 김곡·김선 감독의 <bombombomb>에 청소년 성소수자 이야기를 담았고, 병역거부는 2013년의 도전이었다. 짐작과 달리 ‘탈북’도 일찍이 다뤄졌다. 인권영화 걸작으로 꼽히는 정지우 감독의 은 2004년 탈북 청소년의 허무한 탈주를 애잔하게 그렸다.

주목할 만한 신인 감독들 제작 참여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들은 한 번 개봉하고 사라지지 않는다. 전국의 학교와 도서관 등에서 교육용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요청하는 교사도 있다. 이렇게 해마다 4천 편의 인권영화가 배포된다. 박찬욱, 여균동, 박진표, 임순례, 류승완, 장진…. 인권영화를 만든 감독들이다. 2011년 독립영화 화제작을 만든 감독들이 2013년 인권영화에 감독으로 이름을 올린 것처럼, 최근엔 주목할 만한 신인 감독들이 작품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인권위 관계자와 영화 제작진 등 많은 이들의 헌신으로 영화 제작이 ‘도저히 불가능한’ 비용으로 인권영화는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든 은 10월24일 개봉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bombombo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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