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비엔날레의 55회 행사가 오는 11월까지 열린다. 바다 건너 불구경처럼 접근성이 떨어지는 맹점이 있지만 한국과의 접점이 없지 않다.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전에 한국 작가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고 한국관 전시 역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번 베네치아의 총감독이 3년 전 8회 광주 비엔날레의 총감독과 동일 인물인, 마시밀리아노 지오니다. 자연히 베네치아와 광주의 그것 사이의 유사성을 예측할 만하다. 결과부터 말하면 유사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총감독 지오니의 일관된 기획 철학을 한 번 더 본 셈이다.
3년 전 광주 비엔날레의 제목 ‘만인보’처럼
이번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내세운 타이틀은 ‘백과사전식 궁전’이다. 방대한 이미지의 궤적을 고고학적으로 열거한 뒤 그 안에서 원하는 답을 찾는 총감독의 편집증을 읽을 수 있다. 3년 전 그가 지휘한 광주 역시 이미지의 계보를 과거의 시각 자료로 재구성한 것이었다. 사망한 예술가와 1960년대 전성기를 누린 예술가의 철 지난 작업들이 집결한 비엔날레 전시를 구경하는 경험은 전에 없던 것이었다. 이처럼 기록보관형 전시는 세계 각지에서 소환된 상이한 작품을 하나의 주제어로 묶거나, 현존하는 최고의 예술가로 전시를 구성하는 비엔날레의 일반 룰을 위배하는 것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신선했다. 3년 전 광주의 전복은 올해 베네치아에서도 반복됐다.
예술행사도 전통이 생기면 수구적 관성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 유구한 미술 축제는 관성에 저항하는 획기적인 전환기가 몇 번 있었다. 1999년과 2001년 연달아 총감독을 맡은 하랄트 제만의 비엔날레도 흔히 지목되는 전환기다. 그는 서구권의 지명도 있는 아티스트를 초대하던 관성에서 벗어나, 아시아와 동유럽권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를 소개했다. 이런 실험은 올해 지오니도 다른 각도에서 계승한 것 같다. 둘 사이의 차이점이라면, 제만이 제3세계 신예 작가에게 관대했다면, 지오니는 과거사로 정리된 사료에서 현대적 시야를 구원한 점이다. 동시대 미술축제가 망자와 80대 노년 아티스트들의 깜짝파티 같은 분위기를 선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3년 전 광주 비엔날레가 시인 고은의 를 제목으로 채택한 것도 지오니의 기획 철학과 일치해서일 것이다.
올해 베네치아에서도 지오니는 무궁무진한 무명용사의 무덤에서 보석을 발굴했다. 괴짜 정도로 기억되다가 잊힐 비주류의 기인들을 찾아내서, 주류 미학의 오만을 견제했다. 자신의 아내를 핀업걸 포즈로 연출한 사진을 수년에 걸쳐 수백 장을 남긴 미국의 비주류 예술가 유진 브루엔셴하인(1910~83)의 코너도 그런 경우다. 신디 셔먼이 자신의 인체에 행했던 1980년 사진 연출을 일찍이 시도한 것처럼 보인다. 세간에 가려진 실험적 선례의 연대기는 이렇듯 길다.
숨은 보물 찾기의 백미는 터키 작가 위크셀 아르슬란(1933~)이 1960년대에 남긴 편집적 드로잉과 러시아 출신 예브게니 코즐로프가 (Leningrad Album)이란 제목으로 내놓은, 250개의 드로잉일 것이다. 두 작가가 주로 1960년대에 남긴 퇴폐와 선정으로 가득 찬 드로잉들은 골방에 갇힌 개인이 만들 수 있는 자기 세계의 독보성을 보여준다. 가령 은 작가가 고작 12살에서 18살 사이에 틈틈이 그린 드로잉의 집적으로, 남성 청소년들이 보편적으로 사로잡히는 성적 판타지의 상한선을 폭로하는 반윤리적 후련함과 관음적 가치가 있다.
뮤직비디오처럼 보는 ‘진화’눈길을 끈 동시대 작업을 고르라면 프랑스 작가 카미유 앙로(1978년생)의 영상물이다. 자국 코미디 영화 (Grosse Fatigue)의 제목을 차용한 이 영상물은, ‘분위기만 대충 확인한 뒤 이내 퇴실’하는 미디어아트를 둘러싼 익숙한 관람 풍경과 달리, 영상이 끝날 때까지 다수의 관객이 자리를 지켰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작가는 전도유망한 젊은 미술가에게 수여하는 은사자상의 올해 수상자로 내정됐다. 미국 워싱턴 스미소니언박물관과 프랑스 파리 자연사박물관의 영상 자료를 토대로 ‘진화’를 주제로 뮤직비디오처럼 화면을 편집했다. 화면 전환은 멀티 윈도의 무수한 전멸을 통해 이뤄지며, 작품 해설도 힙합 랩으로 대체했다. 일상적 삶이 컴퓨터 모니터와 스마트폰 화면에 지배되는 동시대인의 시각 체험을 고립시키지 않고 작업 안에 녹여낸 것이다.
베네치아는 현대미술의 허브가 됐다. 비엔날레 전시 기간에 중요한 현대미술 전시회들이 일대에서 동시에 열린다. 비엔날레가 몰고 올 관객의 파도에 편승하려는 거다. 지난 8월 초 베네치아의 무더위에도 입장표를 사려고 늘어선 긴 줄은, 전문가용 미술축제가 대중적 기호에서 이탈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지표로 보였다. 총감독이 선호한 백과전서식 연출은 무수한 소품의 나열로 이미지의 본질을 성찰하게 만든다. 사전 학습이 없는 일반인에겐 관람의 피로감을 줄 수 있다. 반면 카미유 앙로의 감각 돋는 영상물은 동시대인과 친숙한 호흡을 나누는 것 같다. 현대미술의 최전선에서 목격되는 축적된 관록과 선험적 감각 사이의 균형. 현대미술을 지속시키는 이유다.
반이정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