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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어쩌면 특별한

길거리와 인터넷으로 기반 다지고 ‘병맛’ 콘셉트와 달리
좋은 음악 선보이는 크레용팝 ‘대세’… 일베 논란은 해프닝
등록 2013-08-14 16:43 수정 2020-05-03 04:27

지난 8월3일, tvN의 에선 게스트 김구라가 ‘구라용팝’을 불렀다. 8월7일 수요일 아침엔 10월12일 열리는 의 라인업에 크레용팝이 포함되었다는 보도자료를 받았다. 이 뉴스를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몇 시간 만에 1천 건 이상 퍼졌다(이때 페이스북은 ‘5만원으로 광고하면 3만 명한테 보여줄게!’라며 날 낚았다). 그 보도자료의 제목대로, ‘크레용팝이 대세’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요즘 이들 노래를 가장 많이 듣는다.

아이돌 그룹 크레용팝 /크롬엔터테인먼트 제공

아이돌 그룹 크레용팝 /크롬엔터테인먼트 제공

인상적인 길거리 게릴라 공연
크레용팝은 특히 두 가지 점에서 시사적이다. 첫 번째는 이들이 길거리와 인터넷으로 기반을 다졌다는 점이다. 2012년 7월 데뷔한 크레용팝은 연말이 될 때까지 ‘인지도가 바닥’이었다. 하지만 2012년 12월을 기점으로 홈페이지에는 크레용팝 웹툰, 크레용팝 TV, 에피소드 비디오, 뮤직비디오 등의 콘텐츠가 쌓였다. 웹툰은 ‘인지도가 바닥인 걸그룹의 일상’을, TV는 매주 일요일 저녁 9시에 예능 콘셉트의 미션과 게임으로 구성된 영상을, 에피소드 비디오는 길거리 게릴라 공연부터 연습실의 일상까지 보여준다. 자연히 기존 TV 예능, 특히 와 같은 케이블 프로그램이 떠오른다. 이런 구성이 전략적이고 체계적이라서, 크롬 엔터테인먼트(크레용팝의 기획사)의 미디어 콘텐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보인다.
특히 길거리 게릴라 공연이 인상적이다. ‘추리닝’을 입고 거대한 이름표를 붙인 멤버들이 서울 명동, 대학로, 동대문, 강남역, 홍익대 앞 등의 번화가에서 ‘크레용팝’이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돌아다니다 적당한 곳에서 음악을 틀고 춤을 추는데(그리고 이 의상은 방송 무대에 그대로 옮겨진다), 이나 같은 예능 프로그램처럼 위트 있는 자막과 함께 영상이 홈페이지와 유튜브로 유통된다. 그새 일본에도 다녀왔다. 이때 (브라운관이 아닌) 모니터 앞의 사람들은 대략 이런 반응일 것이다. “고생이 많다” “의외로 잘하네?” “재밌어하는 듯?” “뭐야 진짜 별걸 다 하네!” 등등. 덕분에 크레용팝은 씩씩하고 열심히 하는, 혹은 괴상한 아이돌의 이미지를 얻는데, 이전 카라의 한승연에 대한 것과 유사한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때 (인디)밴드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거리 공연을 아이돌 그룹이 실천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리 공연(요즘 말로 ‘버스킹’)은 무대에 대한 공포를 없애고, 라이브 노하우를 훈련해 궁극적으로 멤버들을 성장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이걸 2차 콘텐츠로 만들어 홈페이지와 유튜브로 유통하는 건 덤이다. ‘추리닝’에 치마를 덧입거나, 헬멧(혹은 ‘하이바’)을 쓰는 스타일링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일본의 콘셉트 아이돌인 모모이로 클로버 제트와 유사하다는 지적도 마찬가지다. 핵심은 연습실 거울 앞에선 얻을 수 없는 경험을 이들이 적극적으로 찾았다는 것, 그로부터 일종의 팬덤이 조직되었다는 점이다. 크레용팝의 특이한, 어쩌면 특별한 정체성은 거기에 있다.
걸그룹 포화상태로부터 시작된 현상
두 번째로 의미심장한 건 이른바 ‘병맛’ 콘셉트와 달리 음악이 꽤 좋다는 것이다. 크레용팝을 대중적으로 알린 는 선율보다는 리듬에 집중한 곡이고, 내용적으로는 그저 “다 같이 뛰어! 뛰어!”가 전부다. 하지만 드럼 앤드 베이스 기반의 반복되는 비트, 중독적인 훅, 아기 목소리 같은 귀여운 창법과 음색이 쉽게 각인된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무의미한 가사는 정작 ‘크레용팝’이라는 브랜드를 새기는 데 온 힘을 다하고, 마침내 성공한다. 이 곡의 작·편곡자는 3명인데, 그중 김유민은 샤이니 3집의 와 제국의 아이들 2집의 , 엑소(EXO)의 2012년 티저에 쓰인 의 작곡자이자 밴드 사운드워시의 보컬이다. 의 성공 덕분에 이전의 곡들도 새삼 주목받는다. 는 모두 프로듀싱팀 덤앤더머의 작곡인데, 2001년 이현도가 프로듀싱한 디베이스의 멤버 송지훈과 2004년 데뷔한 그룹 바운스의 강진우가 멤버다. 두 그룹 모두 싸이·유건형 콤비와도 연관이 깊다. 의 편곡자는 로케티어와 이종승인데, 이종승은 1990년대 데뷔한 그룹 뮤턴트의 멤버였다. 이 노래들은 와 달리 디스코·하우스 비트를 기반으로 멜로디가 강조되는, 귀에 쏙 들어오는 댄스팝이다.
‘덕후 커뮤니티’에 내재된 시장
이를 토대로 다시 크레용팝을 보면 이런 결론을 얻는다. 1년 전 걸그룹을 중심에 둔 아이돌 시장은 씨스타가 마지막 성공 모델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크레용팝의 등장과 성공은 오히려 아이돌 시장이 분화·심화되었음을 시사한다. 걸그룹 포화상태로부터 시작된 이런 현상은 오렌지캬라멜에서 이엑스아이디(EXID)를 지나 걸스데이와 크레용팝까지 이을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이걸 ‘병맛 걸그룹’의 계보라고 할 때, 오렌지캬라멜은 같은 트로트 기반의 댄스팝과 웃기는 뮤직비디오로, 이엑스아이디는 처럼 노래와 무관한 ‘토 나오는’ 뮤직비디오로
걸스데이의 과 크레용팝의 는 뮤직비디오로 이 차별적인 정체성을 유지한다.
이 차이는 걸그룹과 보이그룹이 지향하는 팬덤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보이그룹이 보통 10대 초반 여학생을 대상으로 장기 전략을 설정하는 것과 달리 걸그룹은 유동적인 성인 남성을 겨누는데(군대 공연 등의 ‘익명의’ 걸그룹들을 생각해보라), 그때 메이저 기획사의 ‘하이엔드 팝’과는 경쟁을 피하게 된다. 크레용팝 홈페이지 ‘에피소드 비디오’의 한 장면 중 “이번주 뮤뱅(KBS ), 음중(MBC ), 인가(SBS ) 다 까였으니 뭐라도 해야지”처럼 정말 뭐라도 해야 될까 말까 한 상황인 셈이다. 그래서 크레용팝의 일베 논란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인지도 없는 아이돌 그룹으로서는 일단 논쟁의 중심에 있는 것 자체가 절실한 일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이들이 일베 유저냐 아니냐보다는 일베 커뮤니티의 용어가 보편화되는 정황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일베 논란을 해프닝 정도로 이해하는 내 입장에서는, 이들의 활동 방식과 대중적 성공이 현재 한국 아이돌 팝의 산업적·미학적 영역에 대한 비평적 관점을 구하는 요청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이들은 ‘덕후 커뮤니티’에 내재된 시장을 발명할 산업적 징후이자 분기점이 될지도 모른다. 이 얘기는 다음에 해보자.

차우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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