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작가는 의심에 휩싸인다. 내가 온 힘을 다해 쓴 책이 또다시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이 책이 좋은 책이 어서인가, 아니면 광고와 기대와 이름값의 힘인가. 영국 이 셰익스피어의 나라가 아니라 해리 포터의 나라가 된 이후, 조앤 롤링은 차라리 ‘마법의 문 너머로 사라지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고 한다. 롤링의 딸이 터뜨린 첫 말 은 ‘해리 포터’였고, 이혼한 전남편은 저자 서명이 담긴 증정본을 팔아버렸다. 이쯤 되면 조앤 롤링이 성공에 기 뻐하는 것 이상으로 얼마나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했을 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지난 4월, 신예 남성 작가 ‘로버트 갤브레이스’의 책 은 영국에서 1500부, 미국에서 500부 정도 팔리는 잔잔한 반응을 얻는 데 그쳤다. 그러나 조 앤 롤링의 고문변호사에 의해 로버트 갤브레이스가 조앤 롤링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책은 아마존 1위, 초 판본 경매, 30만 부 추가 인쇄 등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조앤 롤링은 신예 작가로서 독자나 평론가의 반응을 살피는 일도 순수한 기쁨이었다며 “비밀이 좀더 오래 지켜지길 바랐다”고 씁쓸해했다고 한다.
스티븐 킹은 ‘리처드 버크먼’이라는 필명으로 5권의 책 을 낸 뒤 ‘나는 왜 리처드 버크먼이었나’라는 글을 통해 “그러니까 사람은 한 번 한 것을 한 번 더 가능할까 어떨 까를 시험해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 그것은 버 크먼이 한 번 더 킹 같은 지위를 획득할 수 있을지 알아 보고 싶었던 것이다”라고 고백했다. 지역 신문에 정체가 밝혀지고 공식적으로 자신이 리처드 버크먼이라는 것을 인정해 실험이 끝난 이후로도 스티븐 킹은 버크먼으로 서 2권의 책을 더 냈다.
<font size="3">가짜 이름으로 차린 소설 공장 </font>
자신의 장르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는 작가들 은 장르적 기대와 편견에서 자유로운 채 진지하게 평가 받기 위해 가명을 즐겨 썼다. 히치콕 영화의 원작이나 모 티브를 수없이 제공한 코넬 울리히는 ‘윌리엄 아이리시’ 라는 또 하나의 유명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추리소설 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는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이 름으로 로맨스 소설을 썼고, 의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역시 레즈비언 로맨스물을 쓸 때 가명을 사 용했다. 이미 평단의 인정을 받은 순수문학 작가들도 가 명으로 범죄소설의 영역에 새 발을 디뎠다. 맨부커상 수 상 작가인 줄리언 반스의 또 다른 이름은 ‘댄 캐버나’였 고, 존 밴빌은 ‘벤저민 블랙’이라는 이름을 썼다.
가명을 이용함으로써 슬럼프와 혹평을 뒤집고 뛰어 난 문학성이 건재함을 보여준 작가도 있다. 로맹 가리는 1975년 라는 소설을 내고 내리막길의 정점을 찍은 상태였다. 혜성같이 등장한 ‘에밀 아자르’의 과 비교를 당하며 표절 시비에까지 시달렸다. 그러나 에밀 아자르는 로맹 가리의 다른 이름이었다.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 의 으로 유례없이 공쿠르상을 두 번 받았다.
두 개의 이름을 사용하는 데는 명성이나 성취감과는 전혀 다른 동기도 있다. 발자크는 소설가가 되기 위해 고 군분투하다가 집세를 내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그는 수 상한 출판업자와의 계약하에 ‘소설 공장’을 차려 “정해진 기일까지 아주 정확하게 장당으로 지불하는 방식으로 저질 소설”을 엄청나게 많이 썼다. 후에 슈테판 츠바이크는 에서 그 시기를 “어둡고도 결코 명예롭지 못한 활동의 작은 일부분”이라고 기록했다. 시인 김수영도 생활의 궁핍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싸구려 대중잡지에서 원고지 70장짜리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김수영은 ‘대두 한 말 값일 정도로 후했’던 원고료에 거부하지도 타협하지도 못한 채, 아내 김현경씨를 시켜 가명으로 소설을 쓰게 했다. 필명은 생계 유지가 어려운 작가들이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쓸 때 몸을 숨길 방패가 돼준 셈이다.
19세기 여성 작가들은 편견과 공격에서 자유롭기 위해 진짜 신분을 감추고 남성 작가 혹은 다른 여자의 이름을 사용했다. 에밀리 브론테는 을 ‘엘리스 벨’이라는 가명으로 발표했는데, 당시 반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와 를 쓴 영국 작가 메리 앤 에번스는 ‘조지 엘리엇’이라는 필명을 썼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부모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의 루이자 메이 올컷조차 처음으로 ‘햇빛’이라는 시를 발표할 때는 ‘플로라 페어필드’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font size="3">예리한 독자에게 밝혀진 정체</font>
현대 출판계에서는 마케팅을 목적으로 ‘출판사와 저자의 협의하에’ 가명 소설을 출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어느 날 문득 등장한 마음을 울리는 신인 작가의 작품에서 사랑하는 거장의 흔적을 발견하는 뜻밖의 사건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리처드 버크먼’이 스티븐 킹이었다는 사실은 미국 워싱턴의 한 서점 직원의 예리한 발견과 집요한 추적으로 밝혀졌다.
한지완 시나리오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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