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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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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검은돈의 천국

원조 ‘탈세 천국’으로 악명 떨친 스위스의 추악한 몰골,
장 지글러의 <왜 검은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등록 2013-07-10 15:35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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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에서 어린아이들이 몸을 팔고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동안, 가정이 파괴되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몸을 누일 잠자리나 일거리를 찾 아헤매는 동안, 이 세 대륙의 적지 않은 나라의 지도급 인사들이 부패와 탈세, 약탈 등으로 긁어모은 수십억달 러가 스위스에 차곡차곡 쌓인다.”

정치인들 대다수 은행 이사 겸직

버진아일랜드에 은닉한 한국인의 재산이 최대 870조 원에 이른다는 비영리 독립언론 의 보도는 경 악할 만한 것이었지만, 조세회피와 돈세탁이 어제오늘 의 일은 아니다. 버진아일랜드가 있기 전 스위스가 있었 다. 명망 높은 스위스 은행은 유서 깊은 돈세탁의 역사 를 자랑한다. 의 저자 장 지글러가 쓴 (갈라파 고스 펴냄)는,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겉모습과 달 리 원조 ‘탈세천국’으로 악명을 떨친 스위스의 추악한 몰 골을 샅샅이 파헤치는 책이다.

스위스는 1935년에 은행 비밀주의를 법제화했다. 이 법제화된 최초의 조세회피처는 왕성하게 성업을 이루며 스위스를 부유하게 만들어주었다. 스위스 은행은 고객의 돈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자들 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마약 자금 세탁과 관련한 형사처 벌 규정이 없는 스위스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객 의 돈을 건네받아 세탁해주는 은행 비밀주의는 고객을 보호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장치로 작용해왔다. 저자는 손 놓고 바라보기만 하는 사법 당국 때문에 스위스가 범죄조직 대부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범죄자의 천국이 되었다고 말한다.

스위스는 독재자들의 곳간 노릇도 자임했다. 전세계의 독재자들이 국부를 빼돌려 부정하 게 쌓은 재산을 스위스 은행이 은닉하고, 빼앗긴 국부를 되찾으려는 모든 시도에 비밀주의를 내세우며 독재자들 의 재산을 지켜주었다. 저자는 부정한 정치가들이 빼돌 린 국부는 해당 국가의 국민이 마땅히 누려야 했던 권리 를 빼앗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라고 비판한다. 결국 이런 작업을 돕는 스위스 은행들 또 한 범죄의 공모자이며 아이들의 굶주림, 사람들의 실직 과 빈곤 등을 자양분으로 삼아 배를 불리는 셈이다.

금융업에 종사하는 소수 집단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스위스에서 개혁은 쉽지 않다. 금융가들의 손을 잡은 정 치가들이 스위스 은행을 위해 입법 방해 행위를 벌이고, 은행의 비밀주의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공공의 적이 된다. 정치인들의 대다수가 은행 이사를 겸직하는 현실 에서, 스위스의 비밀주의를 파헤치거나 해체하려는 지식 인들의 시도에 대해, 금융계가 정치권에 끊임없이 입김 을 불어넣는 것이다.

면책특권 박탈, 소송, 살해 위협까지

‘침묵의 카르텔’을 깬 장 지글러도 보복은 피할 수 없었 다. 스위스 태생으로 스위스 연방의회 사회민주당 의원 으로 활동했던 저자는 ‘더러운 비밀’을 까발렸다는 이유 로 의원 면책특권을 박탈당한 뒤 ‘조국의 배신자’라는 비 난과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은행 신뢰도를 훼손시켰다 는 명목으로 수백만 스위스프랑에 해당하는 손해배상 줄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그들은 사실관계 면에서 어떤 오류도 발견하지 못했 다”며 “자신이 폭로한 모든 사실은 진실”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검은돈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민주적 시 민들이 감시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한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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