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씨가 되었다. “말의 진지를 구축하겠 다”는 말을 처음 꺼냈던 건 2012년 4월 총선 직후의 일이다. 오래전 프랑스 파리에서 에 실린 멕시코의 원주 민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부사령관 마르코 스의 ‘4차 대전은 시작되었다’라는 글에서 읽 은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이다”라는 말을 떠올렸던 것 같다. 그 뒤 1년여 시간이 흘렀 고 곧 이 세상에 나온다.
은 사유와 실천이 함께 존재하 면서 서로 작용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지어 진 이름이다. 덧붙이자면, 구성원들을 삶 의 벼랑 끝으로 내몰아 인간 존엄성의 실추 와 비참을 강요하는 사회의 모순을 겨냥하 고 그 극복을 지향하지만, 궁극적으로 ‘말의 화살’이 겨냥하는 것은 살림(活)이다. 나 자 신이 에 칼럼을 쓰고 한국판 편집인이던 2년 전까지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삶이란 게 복 병이 숨어 있는 법이어서 ‘편한 삶’이 약속된 듯했던 갓 스무 살 때 선배를 잘못 만나 우여 곡절을 겪었는데 뒤늦게 삶의 변곡점을 또 만난 셈이다.
‘시간의 무게’는 우리 모두 감당해야 할 몫 이다. 그 하나의 예로 다음과 같은 투정은 어떨까. 지금은 만신창이가 되어 거기서 모 두 도망치려고 하지만 2년 전까지만 해도 하 나로 통합돼야 한다고 주장하던 ‘진보정당’ 이 있었다. 그 진보에 “무지는 힘”이라는 강 령이 있었다면 지나친 말이 될까? 조지 오웰 이 에서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다음 마지막으로 당의 슬로건이라고 말한 게 바로 “무지는 힘”이다. ‘진보의 미성숙’이 라는 형용모순은 ‘사유하지 않는 진보’라는 또 다른 형용모순과 한 쌍을 이루는데, ‘무지 는 힘’이라는 강령을 떠받치는 것은 권력 추 구의 장력이다.
‘무지’가 지배했던 한국 진보정당 운동가령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는 대 중성의 강조는 ‘민중의 집’ 같은 기획과 실천 을 통한 ‘대중과 함께’로 나아가게 하는 대신 반지성주의와 동의어가 되면서 학습의 깊이 가 세력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쌓아올린 장벽의 높이를 넘지 않도록 작용한다. 일단 다수파에 속하면 자기성찰의 불편함을 피 할 수 있다. 사회운동의 기본 원리는 “조직하 고 학습하고 선전하라”고 말하지만, 헤게모 니 장악이 유일한 목적이므로 학습할 이유 가 없고 조직과 선전은 명분과 실리를 황금 분할해 말할 줄 아는 능력자의 권력 추구를 위한 수단이다.
이뿐만 아니라, 공동의 극복 대상보다도 이른바 진보정치와 조직노동의 장 안에서 벌 이는 권력투쟁의 경쟁 상대에게 더 적대적이 다. 세계관으로 보면 가깝기 때문에 일상세 계에서 만나고 또 부딪히기 마련인데, 세력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투쟁의 경쟁 자이기 때문에 더 적대적 관계가 되는 것이 다. ‘의식화’됐다는, 그래서 남보다 의식이 깨 어 있다는 착각은 겸허 대신 오만과 독선으 로 무장하게 함으로써 사유의 기능을 정지 시킨다. 주입된 진보의 고집은 얼마나 센가. 모든 판단과 행동의 기준은 세력관계에서의 유불리에 있다. 인간과 사회를 보듬어야 한 다는 목적으로 시작된 게 이념이라면, 그것 이 인간과 사회를 배반하는 결과를 빚는 것 은 항용 그 이념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가정 된 권력을 장악하려는 과정이 이념을 배반 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수구 기득권 세력이 기득권의 안보를 위해 국가안보 논리를 끌어 들이듯이 ‘의식화’된 집단의 조직 보전 논리 는 조직의 본디 존재 이유를 배반한다.
“싸움의 과정은 목표로 하는 사회의 모습을 닮아야”지금은 말하는 사람이 없지만, 많은 사람 들이 하나로 통합돼야 한다고 주장했던 진 보정당은 3개가 되었고 13%를 오르내리던 지지율은 4%대로 곤두박질쳤는데, 비슷하게 남은 것은 국회의원 수다. 놀라운 일은 이처럼 진보가 지리멸렬했음에도 그에 대한 진단, 분석, 반성적 성찰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저 나오미 울프의 “우리가 싸우는 과정 자체가 그 싸움을 통해 획득하려는 사회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는 말을 주억거리게 되는데, 그런 일조차 세력관계에서 약자의 속절없는 반응으로 남아야 하는 것은 약자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작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은, 과학기술은 축적되지만 인간 윤리는 축적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층위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다. 절멸 상태에 이르러 그 길밖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벽 여기저기에 붙여 박제한 전태일을 호명하는 일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입으로만 전태일 정신을 외칠 게 아니라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나눠주려고 수유리에서 청계천까지 걸었던 그를 우리 곁에 불러와 살아 숨 쉬게 하고 “나에게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다면…”이라고 안타까워하며 근로기준법을 공부했던 그를 조금이라도 닮는 일이다.
감히 말하지만 의 출발 지점인 ‘가장자리’가 우리 자신을 변하게 하는 만남과 우정, 그리고 학습의 공동체이기를 바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유하는 인간으로 만나는 자율적 학습공동체의 요람으로서 인간과 세계의 뿌리를 묻는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인문학적 관점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성숙시켜야 한다. 각자가 처한 삶의 현실 속에서 동시대성과 상호의존성을 발견하고 우리가 마땅히 공유해야 하는 것을 함께 찾아야 한다. 함께 모여 생각하고 함께 행동하는 법을 배우는 사유와 실천의 거처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지배자들이 금기라고 가르치는 ‘사유’와 ‘우정’을 무기로 하여 시작으로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래서 시대를 꿰뚫어보려는 치열한 인간정신이 담긴 과거와 현재의 텍스트를 함께 읽으며 그 속에서 시대의 모순과 맞서는 정신을 찾고 그 정신을 우리 시대와 치열하게 맞서게 함과 동시에 우리에게 요청되는 새로운 텍스트를 함께 만들어가는 ‘말의 진지’를 구축하려는 것이다.
가장자리는 우리가 함께 소박한 자유인이 되고자 할 때 필연적으로 만나는 자리다. 그것은 하나의 ‘점’일 뿐인 중심을 향하는 권력에 맞서는 저항의 자리이면서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린 자들끼리 더는 추락하지 않게끔 붙잡는 연대의 ‘선’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오만함을 멈추고 겸손하게 물러서는 자리이기도 하다. 본디 ‘민중권력’이란 것은 수상한 말이다. 민중은 권력의 담지자가 되지 않는다. 그 순간 그는 이미 민중이 아니다. 말보다 행동이 더 중요한데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어디에 발을 담그고 있는가, 즉 일상에 있다. 민중의 일상이 권력자의 그것이 아니듯이 권력의 일상이 민중의 그것이 아니다. 호찌민을 비롯한 단지 몇 사람을 빼곤 권력의 일상이 민중의 그것인 예를 들어보지 못했다. 이제는 개천에서 용이 나지도 않지만 설령 난다고 해도 용이 되는 순간 개천 사람들을 대변하지 않고 그들 위에 군림한다. 가장자리가 당당하고 늠름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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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言)이 운다. 격월간 은 울음으로 말하고 분신과 투신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말을 통한 저항’이다. 권력자의 말을 주워담느라 주류 언론이 누락한 ‘말들의 거점’이다. 막혀버린 말의 길을 뚫으려는 ‘말의 몸부 림’다. 그렇게 읽힌다.
창간호의 뜻은 선명하다. ‘이 시대 유령들의 존재론’을 쓰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들의 흔적과 그들의 자리와 그들의 목소리를 추적하고 조명하는” (심보선, ‘자유로운 노동을 위한 유령들의 투쟁’) 글들이 잡지를 가득 채우 고 있다. 이 진단하는 오늘은 ‘존엄을 지키기 위해선 저항하지 않 을 수 없는 시대’다. 자본주의 자체가 혁명이 됐다. “테크놀로지에서 이데올 로기에 이르기까지 지난 수십 년간 우리의 모든 풍경을 바꾸어놓았”고, “새 로운 세계로 직행할 경로를 만들어내려는 모든 시도는 필연적으로 괴물과 대면”할 수밖에 없게 됐다.(슬라보이 지제크, ‘오늘 왜 공산주의인가’)
은 2013년 한국 사회의 ‘아파르트헤이트’(차별과 분리)를 파고든 다. 고통스럽지만 쉽게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말함으로써 빼앗긴 말의 활 로를 찾는다. 정규직 노동자로부터 분할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철탑에 오르거나, 노동자 내부마저 쪼개지는 현실의 민낯 을 드러낸다.(이혜정, ‘말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자본과 노동 양쪽에서 배제당하는 “노동자계급이면서도 노 동자계급이 아닌 계급” 혹은 “더 이 상 어떤 계급도 아닌 계급”을 이야기 한다.(이진경, ‘노동으로부터도 배제된 계급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언어의 주인에게서 언어를 빼앗는 일에 노동 운동과 진보정치가 일조하는 현실(박 점규, ‘정규직 노조 뒤에 숨은 노동운 동과 진보정치’)도 상기시킨다.
의 첫 상차림엔 인공감미료가 없다. 투박하고 질박하다. ‘자본에 맞서는 정치와 자본 너머 정치의 가능성’을 연속기획으로 탐구한다. “완전 히 파멸하지 않기 위해 항상 자기 자신의 일부를 제물로 바쳐야만 하는” (심보선)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묻는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지 고찰하고(김 상봉, ‘다시,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1987년 체제의 ‘타협의 민주화’가 박근 혜 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진 현상을 분석한다(이택광, ‘박근혜는 무엇의 이 름인가’). 홍세화 발행인과 김종철 발행인의 대담도 실렸다. 지 금껏 스스로의 투쟁을 기록하지 못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는 ‘말의 진 지’를 만나서야 펜을 들고 자신의 삶을 기록(이창근, ‘쌍용차 투쟁 르포’)할 수 있게 됐다. 은 ‘기름진 말’에 맞서는 ‘가난한 말들’의 연대기와 도 같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우리는 지금 말의 범람과 결핍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삶과 유리된 공허한, 그러나 화려한 말들이 범람하는 한편 인간 존재의 구체적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언어는 찾기 어렵다.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주장하는 말은 많지만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에 자신을 연루시키는 존재의 떨림을 간직한 언어는 찾기 어려운, 그래서 지금 여기의 절망에 응답하는 언어는 더 절실해진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말의 가능성을 믿는다. 우리에게 말을 통해 인간과 세계를 함께 인식하고 연대하는 것 말고 다른 무기가 또 있겠는가.
은 정치가 행정으로 축소되거나 지배나 군림에 자리를 빼앗겨 권력 장악을 위한 수사로 작용하는 현실에서 종합인문주의 정치비평집을 지향한다. 우리는 권력을 향해 부나비처럼 이합집산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지루하리만치 목격했다. 낡은 것은 수명을 다했지만 새로운 것의 출현은 더딘 시대가 파시즘이 도래할 위험이 있는 시대라고 했던가. 우리는 경제가 기침을 하면 노동은 몸살을 앓는, 정리해고제와 파견제, 비정규직제도를 결합해 포함된 자에서 배제된 자로의 일방통행밖에 허용하지 않는, 그래서 모든 생산직 노동자가 하청업체 비정규직인 기아차 ‘모닝’의 모델을 최종 목표로 삼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역사의 종언’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것에 구멍을 내는 해방 정치의 실천을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진보정치나 노동정치까지 배제해온 자들을 주체로 하는 다른 민주주의, 배제된 자들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배제된 자들을 정치의 주체로 세울 것인가. 그것은 고도의 복잡한 논의 또는 전문가들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가령 기본소득제를 쟁취하기 위한 동력은 프레카리아트라는 존재의 보편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전문가들에게서는 그 동력을 억압하는 말밖에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자본-노동 관계를 변화시켜 노동이 그 자체로 고통이거나 삶을 연명하는 수단이 아닌, 자아실현의 계기가 되도록 사람들의 관계를 전복해야 한다. 노동자에게서 노동을 박탈 하면 ‘비존재’가 된다. 이 ‘비존재’들이 지닌 보편성을 우리는 이 시대 변화의 근거로 삼 아야 한다. 말하는 입을 빼앗겨 굶주린 배 를 채우기 위한 입밖에 남아 있지 않은 벌거 벗은 생명들에게 말하는 입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배제된 자의 민주주의로 가는 첫걸 음이다.
‘사건’이 주체를 형성하고 진리를 만든다이 사유와 실천의 결합, 담론과 서사의 연결을 적극적으로 품으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생겨나는 사건들은 절망을 부르기도 하지만 미래로부 터 오는 신호이기도 하다. 존재의 질서 속에 서 사건은 항상 상황에 내재적인 동시에 존 재의 질서를 넘나들면서 위반한다. 사건 속 에서 주체들이 생겨나고 있다. 사건은 새로 운 것이 출현하는 계기이고 동시에 진리가 생산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런 노 력이 단번에 성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시도하려 한다. 돈도 조직도 없이 학습공동체 조합의 이름으로 잡지를 낸다는 것, 전망이 불투명 한 실험임을 잘 안다. 사회 구성원들의 조합 참여 여부가 관건이다.
*지면을 빌려 독자에게 7월20 일 1박2일 예정으로 울산으로 떠나는 희망 버스에 함께 타기를 간청한다. 그날은 최병 승·천의봉씨가 울산의 현대자동차 앞 철탑 에 오른 지 280일째 되는 날이다. 두 사람은 현대자동차 자본에 대법원 판결대로 불법파 견을 인정하고 모든 사내 하청 노동자를 정 규직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며 지난해 10 월17일 철탑에 올랐다. 가을에서 겨울이 지 났고, 봄을 지나 여름이 왔다. 이미 건강을 많이 상했는데 태풍이 불면 무척 위험하다 고 한다. 한 사람이라도 더 희망버스에 힘을 실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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