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학(夜學)이 아니라 야학(野學)이다. 노들야학은 장애인야학이다. 노들야학에 들어서면 발을 조심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전동휠체어를 막거나 전동휠체어에 발이 슬쩍 밟히게 된다. 그만큼 이곳엔 중증장애인이 많다. 국어·수학·사회 같은 과목을 배우지만 노들장애인야학은 정체성을 밤에 배우는 학교에 두지 않는다. 들판에서 배우는 학교다. 이들의 학교는 학교가 있는 서울 혜화동에만 있지 않다. 장애인, 아니 인간을 등급으로 분류하는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하는 광화문 지하도 농성장에도 있다. 매주 월요일, 노들야학 학생들이 광화문으로 간다. 네이버에서 20주년을 검색하면, ‘롯데월드 20주년’ ‘개그콘서트 20주년’ ‘그것이 알고 싶다 20주년’이 뜨는데, 올해는 무엇보다 노들야학 20주년이다. 보다 재미있고, 롯데월드보다 짜릿하고, 보다 고발성이 강했던 노들야학이 오는 8월8일 개교 20주년을 맞는다.
이동권 위해 끝까지 싸운 노들야학노들야학이 없었더라도 장애인운동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운동이 분명 지금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노들야학은 야학 이상의 역할을 해왔다. 다시, 네이버에 ‘이동권’을 입력하자. “이동권 移動權- 국립국어원 ‘신어’ 자료집에 수록된 단어 입니다. (2003년)” 이제는 익숙한 단어인데, 2003년에 생겼다. 설명도 따라붙는다. “이 동할 수 있는 권리. 서울지체장애인협회 소속 장애인 35명이 6일 오후 5시05분께 서울 지하철 1호선 서울역에서 ‘장애인의 이동권 확보’ 등을 요구하며 집회를 갖던 중 일부가 선로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는 바람에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출처: 연합뉴스. 2001. 2. 6.” 노들야학 박경석 교장은 “협회는 초기 이동권 투쟁을 조금 했을 뿐”이라며 “잘못된 기록”이라고 지적한다. 끝까지 싸운 이들은 노들야학 벽에 붙은 목에 쇠사슬을 묶은 박경석 교장의 사진이 증명하듯, 노들야학과 장애인운동이었다.
노들야학에 ‘공짜 점심’은 없었다. 지금 여기에 어떻게 노들야학이 있게 됐는지 보면 안다. 노들야학은 서울 대학로 ‘금싸라기 땅’ 에 있다. 혜화역 2번 출구를 나와 아르코극 장 쪽으로 걷다가 우회전하면 노들야학이 있다. 가난한 야학이 이렇게 중심가에 있을 필요가 있느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박경석 교장이 답한다. “흔히 나들이라고 부르는, 외진 곳에 장애인이 있으면 비장애인들이 방 문하는 프로그램화, 그것이 문제죠.”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여기는 세상에 자꾸 돌아다니면서 보여주고 만나고 하는 것이 최고의 인식 프로그램이다. 교사들 월급은 최저임금에 식비 10만원을 더해 받아도 비싼 임대료를 내는 이유다. 무엇보다 마로니에공원의 추억이 너무 많다. 2000년대 초반, 휠체어를 끌어안고 버스에 올랐던 곳도 혜화동 로터리요, 2008년 정립회관에서 퇴거당해 한겨울 천막학교를 열었던 곳도 마로니에다. 박경석 교장은 2008년 정립회관에서 퇴거당하고 마로니에공원에서 천막교사를 열었던 시절에 이렇게 썼다.
“강당을, 운동장을 기대하진 않겠습니다. 걸음이 느린 정란이 너무 힘들지 않도록 지하철역에서 가까운, 우준의 거대한 전동휠체어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넉넉한, 수동휠체어를 탄 영애가 눈이 와도 올 수 있는 평지에, 쉬는 시간 우르르 몰려가도 모두 볼일을 볼 수 있게 넓은 화장실과 혹시 불이 나면 대피할 수 있도록 경사로를 낀 그런 교실을, 더 많은 영애와 우준이 찾아올 수 있도록, 너무 외지지 않은 곳에 내어주십시오.”
당신이 탔던 저상버스와 엘리베이터그리하여 2013년 7월2일, 노들야학은 혜화동에서 수업을 한다. 서울 길음뉴타운에서 온 경남씨는 휴대전화로 꽃다지의 를 듣는다. 수업을 기다리는 학생들에게 서울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자, 주원씨는 “경기도에서도 온다”며 끼어든다. 서울 가양동에 사는 선심씨는 전동휠체어에 비스듬히 몸을 누이고 수업을 듣는다. 누워서 악보 받침대에 놓인 책을 본다. 이날 오후 5시, ‘청솔1반’ 문해교과 수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부부인 상연씨와 정란씨는 나란히 전동휠체어에 앉아 그림이 들어간 교과서를 펼친다. 교사인 명희씨가 “오늘 준성이 형이 빠졌어요”라고 말해도, 경남씨는 노트에 ‘아아아 나나나’를 적느라 바쁘다. 전통놀이를 소재로 한 수업을 하다가 명희씨가 준성이 형의 결석 이유를 전한다. “사촌형이 논산에서 일 시켜준다고 해서 같이 갔는데, 모아놓은 수급비를 다 긁어갔대요. 어제 노들에 도망쳐왔는데 사흘을 굶었대요. 오늘 교회 선생님들하고 사촌형 만나러 갔어요.” 명희씨가 “가끔 때리기도 했대요”라고 하자 휠체어를 탄 상연씨의 눈에서 불꽃이 튄다. “때렸다고?” 명희씨는 “금요일에 만나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라고 반복한다. 분위기를 바꾸려 명희씨가 “8월이면 방학이에요. 한 달 남았어요”라고 하자 경남씨는 “맨날 방학이에요?”라고 묻는다. 모두가 웃었다. ‘청솔1반’은 한글을 배우는 반이다. ㄱ, ㄴ부터 배운다. 노들야학에는 기초문해(청솔1), 초등과정(청솔2), 중등과정(불수레), 고등과정(한소리) 반이 있다. 평일 오후 6시30분부터 하루 4교시 수업을 한다. 수요일은 철학과 인문학을 배우고, 목요일은 특활을 한다. 노들야학 벽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글을 배운다는 것은 세계를 읽는 과정입니다.”
오늘 이들이 온 길은 스스로 만든 길이다. 경남씨가 탔던 지하철의 엘리베이터, 선심씨가 탔던 저상버스 모두 노들야학이 목숨 걸고 싸워서 만든 길이다. 2001년 1월15일 오이도역 리프트에서 장애인이 떨어져 숨졌다. 노들야학이 앞장서고 장애인단체가 함께 이동권 투쟁을 벌였다. 같은 해 2월6일, 쇠사슬을 묶고 서울역 선로를 점거했다. 그래도 여전히 정부는 저상버스는 불가능하다고, 새로 짓는 역사가 아니면 엘리베이터 설치도 안 된다고 했다. 새빨간 거짓말. 오늘 당신이 탔던 저상버스, 당신의 어머니가 이용한 지하철역 엘리베이터가 증명한다. 박경석 교장은 웃으며 “데모할 때 노인들이 많이 욕했는데, 지금은 많이 탄다”고 말한다. 장애인이 버스 탈 권리를 요구하는 헌법소원을 내자, 헌법재판소는 그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결정을 했다. 시대의 야만을 폭로하는 사건이었다. 공짜 버스는 없었다.
이들의 역사는 아차산에서 시작됐다. 장애인운동청년연합은 지역사회 장애인과 어떻게 만날까를 고민했다. 정립전자에는 장애인 200명이 일하고 있었다. 아차산의 정립 회관 1층에 공간을 얻었다. 낮에는 탁구장, 밤에는 교실, 그렇게 시작했다. 20주년 기념자료를 모으는 은전씨는 인터뷰 등을 통해 당시를 이렇게 정리했다. “정립회관은 2호선 구의역에서 걸어서 30분, 바로 아랫동네의 상가에서도 10분 정도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야 했으므로 대부분 수동휠체어를 이용했던 정립전자 노동자들이 회관 바깥을 드나드는 일은 차 없이는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아차산 초입에 위치하고 있어 발밑으로 번화한 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이지만 그 속으로 내려가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탁구장에 칸막이를 치고 수업을 했다. 이름은 풍성한 수확을 바라는 뜻에서 노란들판을 줄여 ‘노들’이라고 지었다. 개교 당시 학생은 중검반 2명, 고검반 9명, 교사는 11명이었다. 수업은 즐거웠으나 수업에 들어가긴 어려웠다. 때로 새벽까지 잔업을 했던 탓이다. 1994년 교무일지에는 학생들의 잔업 유무를 기록하는 난이 있었다. 야학은 비로소 1994년 3월, 3층에 독립공간을 얻었다. 정립전자 직원이 아닌 학생도 오기 시작했다.
노들은 학교를 넘어선 공동체박경석은 노들의 역사다. 1993년 노들을 같이 만들었고, 94년 교사가 되었고, 98년 교장을 맡았다. 지금도 교장인 그는 “장기 집권하고 있다”며 웃었다. 처음엔 운전사를 하며 학생들을 ‘조직’하는 일을 했던 그도 선택의 갈림길에 섰던 시절이 있었다.
“1996년, 성남에 있는 장애인복지관에 취직해서 총무과장으로 일했다. 낮에 일을 마치면 허겁지겁 짐 챙겨서 야학으로 달려왔다. 미친듯이 밤의 시간이 좋았다. …1년이 지날 즈음 야학을 그만두고 좀더 직장에 몸과 마음을 바칠 것에 대한 요구가 강해졌다. 고민했다. 심각하게 돈도 생기지 않는 야학을 계속할 것인가, 그래도 생계 유지를 위해 복지관을 계속 다닐 것인가. 인생에서 진짜 남는 게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래서 주저 없이 노들을 선택했다. 백수가 되었다.” 2008년 그가 정리한 글 ‘정립회관 14년의 파편’의 일부다.
1996년 창립멤버들이 야학을 떠났지만, 본격적인 장애인운동은 막 시작되고 있었다. 1998년 에바다 투쟁에 노들도 함께했다. 1999년 첫 상근자를 두었다. 고통의 시간도 있었다. “2000년. 야학 학생이었던 정숙 누나가 돌아가셨다. 정립전자에서 일을 마치고 샤워를 하다가…. 가슴이 찢어지듯 허무하고 아팠다. 46세의 나이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몸이 아파도 숨기면서 일을 하다가 돌아가셨다. 한번 쫓겨나면 이제 취업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으로 그 아픔을 견디다니.”(‘정립회관 14년의 파편들’, 박경석)
야학이냐, 운동이냐. 고민은 언제나 있었다. 노들야학 상근활동가 은전씨가 기록한 ‘노란들판 뿌리내리다’는 “우리는 검시(검정고시) 야학일 수 없다. 우리는 검시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도 검시는 합격해야 한다”는 갈등이 오래전에도 있었다고 전한다. 공부와 투쟁은 이제 갈등하지 않는다. 지금 노들야학 교실 문에 붙은 문구가 말한다. 불수레반의 급훈은 ‘불짱! 집회를 잘 나가자’, 한소리반의 급훈은 ‘화끈하게 놀면서 공부하자’. 노들은 “장애인을 차별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공부와 실천적 행동이 분리된다면, ‘보다 나은 대안적 세상’을 향한 우리의 ‘가치’는 사라지고, ‘기능’의 껍질로 남겨질 것입니다. 노들은 단순한 ‘기능’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로 살아남고 싶다”고 호소한다.
2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인 ‘원더풀 노들’은 묻는다. ‘가장 인상적인 단 하나의 추억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의 노들은 어떤 장면입니까?’ 박경석 교장은 2008년 겨울을 떠올렸다. 새벽에 내린 눈으로 천막교사가 있던 마로니에공원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핍박받던 애굽을 떠나 광야를 헤맸던 이들의 고통과 해방을 느꼈다. 14년을 지냈던 정립회관은 공간 부족 등을 명분으로 2007년 퇴거를 통고했다. 박경석 교장은 “그들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제기해서”라고 돌이켰다. 2008년 1월2일, ‘길거리에 나앉아도 수업은 계속된다’라고 쓰인 깃발을 내걸고 살았다. 혜화동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자, 학생이 60여 명으로 늘었다. 그렇게 스무 해, 어림잡아 600명이 노들을 거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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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야학은 원래 8월5일 음악회를 시작으로 20주년 기념행사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도저히 바꾸지 못하는 행사 장소, 마로니에공원 보수 공사가 늦어져 일정도 미뤄졌다. 노들야학 사람들은 “공사가 자꾸 미뤄져 걱정”이라고 말했다. 예정됐던 행사는 10월21일 노들음악회를 시작으로 영화제, 노래자 랑대회, 북콘서트로 이어진다. 8월8일에는 간단한 기념식 행사만 치를 예정이다. 사실 행사는 이미 시작됐다. 5월7일 민중가수 박준을 시작으로 도법 스님, 김조광수 영화감독이 노들에서 특강을 했다. 7월10일에는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에 노들야학과 ‘충돌’하기도 했던 유시민씨가 ‘공부하는 삶’을 주제로 강의를 한다. 1998년 창간한 을 모아 책도 만든다.
무엇보다 20주년을 맞아 임대료 걱정없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주춧돌 놓기 사업을 벌이고 있다. “스무 살이 된 노들은 이제 노란들판에서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희망을 일구는 터’ 하나를 준비하려 합니다. 그 ‘희망을 일구는 터’에서 중증장애인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놀고, 즐기고, 자립생활하고 싶습니다. ‘희망을 일구는 터’를 마련하는 곳에 주춧돌 하나씩 놓아주시면 감 사하겠습니다.” 20년을 견딘 이들이 세상에 내미는 손이다. 박경석 교장은 “노들야학, 노란들판, 장애 인문화예술판이 뿔뿔이 흩어져 있다”며 “일과 공부와 투쟁을 함께하는 지역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 고 호소했다. 후원 신한은행 100 025 323501(노들장애인야학 박경석), 문의 사무국 02 766 9101.
노들에 영원한 졸업은 없다. 명학씨는 18년째 노들에서 배운다. 정립전자 사원 시절부터 다닌 그는 “여기가 나에겐 제2의 탄생”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음 같지 않아 자포자기하려는데 선생님이 잡아줬다”고 말했다. 오랜 노력 끝에, 그는 대입 검정고시까지 마쳤다. 명학씨는 “공부도 하고, 집회도 나가는 여기가 소중하다”며 “노들은 마약 같다”고 말했다. 그에겐 처음이자 마지막인 학교인 것이다. 무엇보다 노들에서 이들은 관계를 배운다. 지금도 야학에 오는 일이 유일한 외출인 이가 적잖다. 노들은 학교를 넘어선 공동체다.
청솔1반에서 같이 수업을 받았던 상연씨 는 2008년 마로니에공원에서 노숙투쟁을 했다. 시설 비리를 폭로했고, 자립 기반을 마련해달라고 요구했다. 올해 노들야학 총학 생회장이 된 상연씨는 “처음 나오고 겁을 먹었다”며 “나가보니까 너무 좋았다”고 말했 다. 상연씨는 “처음엔 좋은 누나로 지냈던” 정란씨와 노들에서 만나 결혼했다. 탈시설 요구는 자립주택 ‘처음홈’ 제도로 이어졌다. 이렇게 필요하면 필요한 것을 만들었다. 시설에서 벗어난 삶을 살려고 2002년 노들장 애인자립센터를 세웠다. 노동권이 절실해서 2006년 자립공장 ‘노란들판’을 만들었다. 문화적 평등권을 확보하고, 장애인 예술가들 이 꿈을 펼칠 ‘장애인문화예술판’도 2008년 에 시작했다. 장애인 야학으로 지원금을 받는데, 이것도 공짜가 아니다. 2004년 교육부 앞에서 삭발투쟁을 벌였다. 당시 장애인 야학 지원의 법적 근거가 없었다. 이렇게 확보한 지원금도 충분치 않다. 600명의 후원인이 돕고, 연말이면 후원 행사를 열어 적자를 메운다.
작은 학교 ‘노들’의 스무 해 이야기개교 10주년 기념사업 팀장이었던 은전씨는 20주년 기념사업도 맡았다. 그는 ‘노들과 당신의 이야기’에 이렇게 썼다. “‘노들야학한 다’는 것이 형광등을 갈고, 사라진 걸레를 찾아 돌아다니듯 사소할 뿐이지만, 그럼에도 웃을 일이 더 많았으니 충분히 행복한 날들 이었습니다. …‘누군가는 노들을 지켜주었으 면’ 했던 당신의 이기적인 마음도 실은 누군 가 남아서 형광등을 갈고, 칠판 지우개를 갈아주길 걱정했던 것이라고 나는 짐작합니 다.” 이어서 그는 친구와의 대화를 전한다. “노들을 잘 모르는 내 친구가 나에게 묻던 말이 있죠. ‘어제도, 그제도, 한 달 전에도, 심지어 1년 전에도, 똑같은 사람들이랑 도대체 무슨 이야길 하는 거야?’ 나는 그럼 이렇게 대답합니다. ‘노들 이야기! 얼마나 재밌는 데. 그리고 우리, 매일 다른 얘기 해.’” 그가 찾아낸 1990년대 교사일지에는 비슷한 기록이 있다. “오늘 일어난 일: 아무런 특별한, 별일이 없었다. 웃긴 했는데 무슨 일로 웃었는지 모르겠다.” 은전씨는 “작은 학교 ‘노들’ 의 스무해 이야기는 아직 충분히, 말해지지 않았으므로, 다시 ‘듣는 일’부터 시작하고 싶다”고 글을 마친다. 이 기사 역시 노들 이야기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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