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볕 아스팔트는 타올랐다. 비둘기가 한 마리 온다. 뒷짐을 지고 있다. 뒤뚱뒤뚱, 눈 마주치지 않고 구경하다 자기 할 말만 하는 샌님 할아버지 같은 폼, 그놈이 다가오더니 의자를 톡 쪼고 갔다.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관심 하나 없는 저 신발, 그 형 생각나네. 이거는 잘 팔릴 것 같은데 안 팔리고… 나 같애. 이거는 왜 팔리는지 모르겠는데 인기가 있다니까. 아스팔트가 식고 할로겐 불빛을 밝힐 때까지 오늘의 손님은 0, 매상은 0.
마영신(31·사진)은 ‘소외된 노동’을 하는 만화가다. “내가 무슨 독립영화 감독도 아니고 딴 일로 돈 벌어서 만화 그리고 사네.” 이 대사가 나오는 만화 ‘긴 겨울’( 2012년 3월)은 아르바이트 열전이다. 동갑내기로 보이는 사내로부터 수모를 견디는 당구장 알바, 강원도 바닷가 노가다, 5분 완성이라지만 10~15분이 걸리는 아바타 인형 제작 노점상, 쉬울 것 같아 바꾸었으나 하루 손님이 비둘기뿐이기도 했던 여성신발 노점상. 주인공은 어린이 잡지 만화 연재가 결정되면서 떠돌이 아르바이트 생활을 접게 된다.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을 거쳐 가을이 되어 있다.
마영신의 ‘소외된 노동’의 집성체가 최근 출간된 장편만화 (새만화책 펴냄)이다. 그는 21살 병역특례로 인천 남동공단에 배치되었다. 인천터미널로 가 셔틀버스를 타고 공장까지 집에서 1시간40분이 걸린다. 첫날 만난 다른 ‘병특’ 말에 따르면 “월요일은 그래도 시간 잘 가는 날이야. 아침에 예배 드리면 오전 금방 가고 점심 먹고 오후 슬슬 마치면 다음날 화요일, 여기 수요일 날은 맛있는 거 나오는 날인데 화요일은 다음날 뭐 나올까 생각하면서 보내고, 수요일은 맛있는 거 나오는 날이니까 기분 좋아서 시간 금방 가고, 목요일은 다음날 금요일이니까 그 생각에 시간 금방 가고, 금요일은 마지막 일하는 날이니까 기분 좋아서 시간 금방 가버리지, 그렇게 하면 시간 금방 가”. 듣자 하면 시간이 빨리 가야 하는데 하루는 무지 길다. 제관실에 배치된 그는 그라인더로 작은 철판 끝을 갈고, 드릴로 상판을 뚫고, 도면을 보며 마킹 위치에 맞춰 선을 그리고, 용접을 하고, 용접으로 불탄 자국에 질산을 바른 뒤 하이타이로 씻고, 철판을 옮긴다.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간다 싶으면 화장실에 가서 좌변기 옆에 쪼그리고 앉아 눈을 감는다.
‘남동공단’은 온전히 마영신의 20대다. 남동공단에서 만화를 시작했고 이 첫 장편이 되었다. “95% 리얼”인 공장 시절, 실제 마영신은 “여자친구한테 전화도 하지 말라고 하고” 퇴근 뒤 집에서 만화 를 완성했다. 대학 다니며 부산의 영화 세트장에서 아르바이트한 경험을 극화한 것이다. 26~28살 2년6개월의 저녁 시간을 쏟아부어 완성되는 의 노동은, 실제 그 노동을 하던 시절에는 다른 노동이 만화의 재료였던 것이다. 50쪽의 만화를 완성하고 나자 ‘만화’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다짐이 섰다. 그렇게 남동공단의 ‘소외된 노동’은 또 다른 ‘만화가’라는 직업적 노동을 준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노동, 이런 거 관심 없는데, 많이 하게 됐네요.” 어린이 교양 만화 월간지 에서 노동법 만화 ‘동동이’를 연재하기도 했다. 그는 이 ‘노동 만화’가 노동현장 고발 만화나 구호로 읽히는 것이 극히 경계스럽다. 원체 심각한 건 싫어한다. 인도에서 온 노동자 옆에서 ‘뚫흙송’ 읊조리는 장면이나 탁구 내기에 목숨 거는 사람들, 이혼남의 연애 등으로 만화는 활기차다.
만화를 그리기 위해 노동을 하고 노동은 만화가 되어 있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할 때 피곤해도 매일 메모를 했다. 그러니까 그의 노동은, 서울 이태원 부근 한남동 키드의 호르몬 과다 분출기 (씨네21북스 펴냄, 2009년 부천만화대상 우수만화상 수상작)가 날라리 경험을 살렸던 것처럼, ‘만화의 질료’다.
<font size="3">“사실 가장 부담되는 한 사람, 마영신”</font>만화를 그린 10년간 선거캠프, 관공서, 동화책 그림을 그리는 와중에 편의점 알바와 보험사 직원을 전전하며 1천만원에서 3천만원을 오가는 연봉을 벌었다. ‘긴 겨울’에서 그는 비슷한 처지의 만화가와 대화를 나눈다. “눈 딱 감고 돈 되는 만화 그려.” “못 그리겠어. 그러면 가짜가 나오거든.” “성향이 정말 상업적으로 타고난 사람은 복 받은 거지. 그게 진짜 좋아서 하는 거잖아.” “성향이 상업적이어도 새로운 걸 못 만들어내면 그것도 가짜지.” 대중의 눈 밖에 났다는 그가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 “사실 나는 만화를 그리면서 제일 부담되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그건 바로 마영신이다. 마영신은 나의 만화를 가장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
경험이 질료가 된 리얼한 만화는 경험하지 않은 경험도 리얼하게 구성해내는 단계로 나아간다. 마영신은 4월호에 ‘삐꾸래봉’ 연재를 시작했다. 새끼손가락이 굽은 ‘삐구’에다 주인공 이름 ‘박래봉’이 합쳐진 제목이다. 초등학교 5학년 교실이 배경이다. 수학 문제를 물으러 온 반장한테 “반장이 이것도 몰라” 했다가 이지메 표적이 되고 만다. 수업 시간에 빵셔틀을 강요받고 강도를 더해가는 폭력을 꼼짝없이 견뎌야 한다. 침대에 누우면 “내일은 애들이 좀만 괴롭혔음 좋겠다”. 2012년에 단행본으로 나온 는 해병대가 배경이고, 은 성추문에 휩싸인 시간강사 얘기다. 자연스러운 대사와 아이러니하고 충격적인 마무리까지 물이 올랐다. “‘삐꾸래봉’은 2년간 예정하고 있는데, 그동안에 어머니 또래 아줌마들의 연애 이야기 과 아주 센 ‘포르노그래피’를 완성할 생각이다. 아마 최고의 작품이 되지 않을까.” 건방진 한남동 날라리가 일하며 이렇게 컸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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