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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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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동 진심 혹은 대담

민규동 감독이 만든 조금 다른 멜로영화 <끝과 시작>
시간의 흐름 뒤집는 형식에 파격적 반전 더해져
등록 2013-04-07 17:05 수정 2020-05-03 04:27

민규동 감독의 은 460만 관객을 동원한 전작 과 사뭇 다른 영화다. 이 적당한 유머와 적절한 긴장을 타고 흐르다 예상 가능한 결말로 치달았다면, 은 격렬한 신음 소리로 시작해 예상치 못한 반전을 남기고 끝난다. 같은 영화가 민규동 감독의 대중적 면모를 드러냈다면, 은 그가 ‘사랑’에 대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놓는 영화처럼 보인다. 김태용 감독과 공동 연출한 로 데뷔한 민규동 감독이 그동안 만들어온 영화들에 밴 ‘대중적 고려’가 에서는 조금 옅어진 것이다. 그만큼 ‘자유로운 민규동’을 만나는 기회다.
영화는 두 여자와 한 남자의 관계를 다룬다. 영화의 시작, 재인(황정민)은 아내가 아닌 여자 나루(김효진)와 격렬한 사랑을 나눈다. 채찍 소리가 들리고, 입가엔 피도 흐른다. 그렇게 사랑을 나눠야 남자는 글이 써진다. 치정을 다룬 영화가 아닐까 하는 순간, 남자는 스스로 초래한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재인의 아내 정하(엄정화)는 남자의 유골을 뿌리는 장면에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에 남자와 함께 사고를 당해 붕대를 감은 나루가 찾아온다. 불가능한 일이 천연덕스러운 현실이 되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형식을 빌린 장면을 통해 정하의 집으로 들어온 나루는 “욕하고 때려도 좋아. 그냥 같이 있게만 해줘”라고 애원한다. 그리고 정하가 어떤 수모를 주어도 나루는 버틴다.

영화 ‘끝과 시작‘의 주인공 역할을 한 엄정화, 황정민, 김효진(윗쪽 사진). 정하(엄정화)와 나루(김효진)의 과거가 드러나자 인물들 사이의 관계는 새롭게 해석된다. 수필름 제공

영화 ‘끝과 시작‘의 주인공 역할을 한 엄정화, 황정민, 김효진(윗쪽 사진). 정하(엄정화)와 나루(김효진)의 과거가 드러나자 인물들 사이의 관계는 새롭게 해석된다. 수필름 제공

‘플래시백’ 대신에 ‘플래시 포워드’

은 재인이 동창회에서 만난 정하에게 자신이 쓰고 있는 대본을 들려주는 ‘이야기 속 이야기’ 형식으로 진행된다. 처음은 ‘재인과 나루의 이야기’, 다음은 ‘재인과 정하의 이야기’, 끝으로 ‘정하와 나루의 이야기’. 마치 재인이 이야기를 지어내며 “무슨 일이 있었냐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미래의 대본’은 ‘지나간 현실’처럼 보인다. 과거로 가는 ‘플래시백’ 대신에 미래로 가는 ‘플래시 포워드’ 형식인 것이다. 그래서 ‘시작과 끝’이 아니라 이 된다.

“질투가 있어야 뜨거워.” 에 나오는 대사다. 어쩌면 은 헤어지고 싶을 만큼 지루해진 부부 관계를 질투의 힘이 치유하는 영화다. 도 다르지 않다. 정하는 남편 재인에게 ‘예술적 뮤즈’가 되었던 나루를 질투한다. 자신이 그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그 질투는 남편의 죽음으로 만회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더욱 정하는 나루를 학대한다. 겉으로 정하가 나루를 학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학대당하는 것은 정하 자신이다. 스스로를 학대하는 정하의 곁을 무작정 지키는 나루는 오히려 치유자다. 나루가 정하의 집에 머무르는 이유는 죽은 남자를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산 여자를 걱정해서다. 이처럼 문제를 발견하고 치유하는 여성은 민규동 영화의 저변에 흐르는 테마다. 에서도 처음엔 문제의 근원처럼 보이지만, 결국 관계의 치유자가 되는 것은 아내였다. 이런 여성들 앞에서 남자들은 그저 무력하다.

후일담, 연결고리는 김효진

민규동 감독이 나루를 연기한 김효진을 두고 “보석 같은 배우”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영화에 ‘노력 봉사’해준 배우에 대한 립서비스 차원으로 들리지 않는다. 김효진은 담담한 고통과 절박한 진심을 하나의 표정으로 드러낼 줄 아는 배우가 됐다. 의 10대 소녀는 그렇게 20대의 배우가 됐다. 민규동 감독이 을 “의 후일담 같은 영화”라고 말했는데, 두 영화 모두에 출연한 김효진은 두 영화의 비밀 같은 존재다.

민규동은 ‘퀴어’ 코드에 대한 애정을 영화에 꾸준히 담아왔다. 여고생들 사이의 애증을 그린 , 꽃미남 게이들이 난무했던 가 대표적이다. 에도 논란이 될 만한 파격적인 베드신이 있다. 영화 제목은 T. S. 엘리엇의 시에서 따왔다.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나의 시작에 나의 끝이 있고, 나의 끝에 나의 시작이 있다’(In My Beginning Is My End. In My End Is My Beginning)가 올라간다. 원래 은 2009년 개봉한 옴니버스 영화 의 네 번째 에피소드였다. 이 단편을 장편으로 재구성해 다시 관객에게 선보이는 것이다. 4월4일 개봉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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