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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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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정돈 혹은 소외된 여성

영화평론가 허지웅·황진미,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를 보는 두 가지 시선
등록 2013-03-16 14:55 수정 2020-05-03 04:27
영화 ‘스토커’의 한 장면.

영화 ‘스토커’의 한 장면.

‘거장’ 가능성의 강력한 단서숨 막힐 정도로 제어되고 통제된 구성의 산물, 그러면서도 풍부한 감상의 여지 제공해

한국 영화계에서 박찬욱은 이미 거장으로 분류된다. 사실 나는 박찬욱을 거장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의 영화 가운데 좋아하는 것이 있고 동의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같은 영화 안에서도 뛰어난 부분이 있고 과하게 계산됐다고 타박하게 되는 지점이 있었다. 이나 를 제외하면, ‘특유의 미감에 근거해 키치 정서를 시장에 조달하는 대변인으로서의 영화광 출신 감독’ 정도가 솔직한 생각이었다.

처럼 공들인 편집

이처럼 한국에서 영화를 즐겨 보는 관객치고 박찬욱과 그의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자기 나름의 ‘확정적 선입견’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를 보기 전에 나는 이 영화가 박찬욱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지웠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영어권 배우들로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만든 미국 영화니까.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나는 흡사 (거칠게 비유하면)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를 본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누구든, 그가 훗날 거장 소리를 듣게 된다면 나는 그의 커리어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단서로 를 꼽을 것이다.

는 연출과 연기의 톤 조절, 미술, 촬영, 음악, 그리고 특히 편집, 그러니까 영화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부분이 단단하게 정돈되어 있다. 의 이미지들은 세공에 가까운 수준으로 제어되어 있다. 히치콕영화평론가의 를 연상시킬 정도로, 편집에 들어간 품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 이왕 를 언급했으니 말인데, 찰리 스토커는 자주 노먼 베이츠를 화면 위에 불러온다. 찰리가 처음으로 전신을 드러내는 공동묘지 컷 또한 노먼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베이츠 모텔을 배경으로 서 있는 의 포스터를 정확히 환기시킨다. 베이츠 모텔-노먼 베이츠, 묘지-찰리 스토커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의 음악은 이 영화가 연출자의 일관된 비전에 의해 얼마나 잘 제어되고 있는지 드러내는 단서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웨스 앤더슨을 상찬하며 그가 얼마나 음악을 잘 다루는 연출자인지 거론한 바 있다. 여기서 ‘음악을 잘 다룬다’는 것은 단지 좋은 음악을 선곡하는 능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음악을 잘 다루는 연출자의 영화에서 음악은 배경의 장식품이 아니다. 영화의 다른 요소들과 어울려 적재적소에서 유기적으로 대응하며 그 자체로 서사를 만들어내는 음악의 쓰임을 의미한다. 의 음악이 바로 그렇다. 클린트 맨셀의 음악은 그 자체로도 근사하지만 시작과 맺음, 음악이 있어야 할 부분과 없어야 할 부분을 정확히 통제하는 연출자의 비전 안에서 빛을 발한다.

그 이유는 ‘감독이 시켜서’?

의 놀라운 점은, 이토록 숨 막힐 정도로 제어·통제된 구성의 산물임에도 감상에서 풍부한 여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는 연쇄살인마의 이야기다. 또한 인디아가 진짜 자기 모습을 발견해나가는 성장 영화다. 동시에 는 대물림의 메커니즘으로 유사 뱀파이어 영화의 골격을 갖는다. 결정적으로 는 주인공의 태생과 각성, 그리고 자기 역할을 인지해내는 구조 안에서 명확한 히어로 영화다. 는 , 브램스토커의 와 같은 텍스트들의 소용돌이 안에서 어느 한 지점을 답습하거나 함몰되지 않고 명확한 개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는 의문 한 가지. 인디아의 총구가 향한 곳은 왜 그(녀)였을까. 이미 자기 정체성을 확신하고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대답할 수 있게 된 인디아에게 그(녀)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존재였을지 모른다. 인디아가 총을 겨냥했을 때 총구가 누구를 향하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총구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만이 안다. 그 순간 그(녀)는 웃음짓는다. 그것은 자식을 대견해하는 부모의 미소다. 인디아가 그(녀)를 살해하는 건 보호자가 필요 없는 완전체의 자기 확신이자, 영웅신화로서의 당연한 귀결이다. 아니 어쩌면 아무도 이유를 모르는데 그냥 ‘감독이 시켜서’였을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나. 결국 이름을 떠올려보자면, 이건 박찬욱 영화이다.

허지웅 영화평론가
어머니는 남편·딸·삼촌을 모두 사랑했지만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빈집에 홀로 남는다. <스토커>는 성장담에서 의도적으로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배제한다. 20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어머니는 남편·딸·삼촌을 모두 사랑했지만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빈집에 홀로 남는다. <스토커>는 성장담에서 의도적으로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배제한다. 20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사이코패스가 혈통의 문제?살인을 개성의 발현으로 이해… 도발적인 서사 뒤에는19세기 부르주아적 세계관이

도로변에 차가 서 있고, 차에서 내린 소녀가 읊조린다. “꽃이 자신의 색깔을 고를 수 없듯이… 난 구출되거나 완성된 거야.” 첫 장면은 마지막 장면으로 이어진다. 관객은 이것이 고립됐던 소녀가 자기 본성을 깨닫고, 세상으로 나가는 출정식에 보안관 한 명을 해치운 것임을 알게 된다. 맞다. 영화 는 살인 소녀의 성장기다. 어쩌면 는 유사 뱀파이어 영화로 읽히기도 한다. ‘스토커’ 가문은 의 원작자인 브램 스토커를 연상시키고, 고립된 저택은 고딕 느낌이 난다. 발달된 오감은 뱀파이어들의 특징이고, 살육과 섹슈얼리티를 뒤섞으며 이를 본성으로 치환하는 세계관도 유사하다. 살육을 마친 뒤 삼촌과 소녀가 취하는 동작은 할리우드판 의 포스터를 연상시킨다.

그 이유는 ‘동물의 세계’ 약육강식

를 성장영화이자 유사 뱀파이어 영화라고 읽으며, 형식미에 찬탄하기는 쉽다. 문제는 영화의 윤리학과 성정치학이다. 첫째, 살인·광기·혈통·본성·자아실현 등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야 한다. 둘째, 가장 미진하게 그려진 엄마와 딸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

첫째, 영화의 최종적 비밀은 삼촌은 8살에 동생을 죽였고, 일면식도 없는 조카에게 ‘같은 본성을 지녔다’며 18년간 집착했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려면 살육의 본성이 혈통에 의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 이들은 아예 뱀파이어가 아니기 때문에, 영화가 이들의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는지가 중요하다.

영화는 사이코패스를 혈통의 문제로 본다. 같은 혈통을 지닌 부녀는 사냥을 다니며 ‘더 큰 악을 막으며’ 살았는데, 삼촌에 의해 본능을 깨친 소녀는 자아실현을 위해 떠난다. 그녀는 세상과 충돌하겠지만, 영화는 개의치 않는다. 동생을 죽인 삼촌은 사법이 아닌 가족에 의해 격리됐고, 강제적 추방이 아니기에 그가 원할 때 돌아왔다. 해결이 아닌 유예는 다시 살육을 낳았다. 어릴 때부터 그를 보아온 가정부와 고모도 그를 겁낼 뿐 막지 못한다. 영화는 그 이유를 동물 다큐멘터리를 통해 약육강식으로 설명한다. 영화는 살인을 윤리가 아닌 개성의 발현이자 생태의 원리로 이해하며, 개인과 가정만 존재할 뿐 사회는 아예 없는 듯 그린다. 살인 소녀의 성장기라는 도발적인 서사 뒤에 19세기 부르주아적 세계관이 자리한다.

둘째, 니콜 키드먼이 연기를 했음에도 엄마는 존재감이 없다. 그녀는 안팎으로 소외되었다. 일류 교육을 받았지만 저택에 갇혀 세상과 단절됐으며, 요리도 못하는 그녀는 가정 내의 역할도 없다. 남편과 딸의 애정으로부터도 소외돼 있다. 삼촌에게 여성성으로 다가가지만, 삼촌의 관심은 딸을 향한다. 혈통적 동질성 때문이다. 그녀는 집안에서 가장 남이다. 가부장제에서 갓 시집온 여자는 집안에서 가장 남이지만 자식과의 관계를 통해 중심으로 옮겨간다. 그러나 때때로 자식도 ‘이 집안의 씨’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소외감에 치를 떤다. 그녀는 딸과 한 번도 친밀한 접촉을 나누지 못했다. 머리 빗겨주는 장면에서도 딸의 손길에서 살기를 느껴 저지한다. 그녀는 남편, 딸, 삼촌을 모두 사랑했지만 누구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하고 빈집에 홀로 남는다.

아버지의 딸을 가부장제 안으로 편입시키기

에서 성현은 자신이 만든 태주가 살육으로 날뛰자 죽여버리지만, 의 소녀는 살육을 깨우쳐준 미성숙한 삼촌을 쏘아버린다. 는 에 비해 어린 여성의 주체성을 긍정하지만, 중년 여성의 주체성은 철저히 짓밟는다. 소녀는 아빠의 벨트를 절제의 의미로, 삼촌의 구두를 성장의 의미로 받지만, 엄마의 112블라우스로부터 받은 것은 생물학적 여성뿐이다. 그녀는 스토커 가문의 딸, 즉 아버지의 딸로 자신을 정체화하며 “딸이자 아들”이라 노래한다.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피폐하게 그리고, 중년 여성을 무가치한 존재로 그리면서, ‘아버지의 딸’은 ‘딸이자 아들’로서 가부장제 안으로 편입시키는 것. 박근혜 시대의 여성주의가 봉착한 위기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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