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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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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대한 욕망의 계보학

개발 시대부터 외환위기 직후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돈에 대한 욕망의 계보 다룬 <돈의 화신>
등록 2013-03-02 13:27 수정 2020-05-03 04:27

경기도 양평의 한 산사태 복구 현장. 굴착기가 땅속을 파헤치자 갑자기 엄청난 양의 돈다발이 튀어나온다. 그 순간, 사람들에게 잠재돼 있던 욕망도 함께 맨얼굴을 드러냈다. 돈을 차지하려는 이들 사이에서 아귀다툼이 벌어지고, 발견된 돈의 양은 무려 수백억원대로 밝혀진다. 2011년 전북 김제에서 일어난 ‘마늘밭 현금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SBS 주말드라마 첫 회 도입부다. 이 장면을 통해 은 앞으로 이야기하려는 돈과 욕망의 살풍경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신자유주의 무한경쟁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며 ‘돈’을 주제로 세태를 반영한 드라마들이 속속 등장했다. ‘돈의 화신‘은 돈이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시대가 어떻게 욕망을 살찌우며 변화해왔는지를 그린 드라마다. SBS 제공

신자유주의 무한경쟁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며 ‘돈’을 주제로 세태를 반영한 드라마들이 속속 등장했다. ‘돈의 화신‘은 돈이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시대가 어떻게 욕망을 살찌우며 변화해왔는지를 그린 드라마다. SBS 제공

후기 자본주의 시대 슈퍼히어로들

의 이야기가 현금 발견 시점에서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1998년은 외환위기가 찾아온 다음해고, 이와 함께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된 우리 사회의 결정적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양산되고 중산층이 와해되는 비극의 다른 한편에선, 부동산과 주식 투기로 성공 신화를 꿈꾸는 대조적 풍경이 이어졌다. 이 시대의 화두는 ‘생존’ 혹은 ‘대박’이었다. 2001년부터 전국을 뒤덮었던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문구는, 돈을 모든 것의 우위에 놓는 가치관이 노골적으로 유포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시대적 욕망의 맨얼굴을 그려낸 드라마도 속속 등장했다. (2003), (2007), (2008), (2011) 등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들 드라마와 기존 성공기 드라마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점이 존재한다. 성공담의 자아성취 같은 측면은 전무한 채, 도박·사채·펀드 등 이른바 ‘대박 신화’를 노리는 업종에서의 물질적 성공을 주로 다룬다는 점이 그렇다. 가령 천재적 도박 실력으로 세계포커대회에서 우승하는 의 인하(이병헌)나 뛰어난 두뇌로 사채업계의 큰손이 되는 의 금나라(박신양)는, 이를테면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슈퍼히어로라 할 만한 활약을 펼친다. 물론 욕망의 허무함도 다루지만 극의 주된 쾌감은 그들의 물적 성취에서 비롯되기에 이 시대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외환위기 이후 등장한, 돈과 욕망에 관한 드라마들 중 인상적인 작품은 2010년 방송된 두 드라마 과 다.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1970년대에서 이야기를 출발하며 이 시대의 욕망에 토대를 제공한 근원적 지점을 파고든다. 예컨대 은 군부정권과 결탁해 부를 축적한 독점 재벌의 성장사, 는 정경유착으로 전개된 서울 강남 지역 개발사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치며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가 모든 가치를 압도하던 개발독재 시대의 성장 이데올로기가 지금 우리 시대의 노골적 욕망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비춘다.

이 돈과 욕망을 다루는 방식은 두 작품의 연속선상에 있다. 이 작품은 1998년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인물들을 지배하는 것은 그 이전부터 형성된 이중만 회장(주현)의 신조다. 즉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다”는. 이중만은 의 김태진 회장(이순재)처럼 지방에서 홀로 상경해 맨주먹으로 성공 신화를 일군 부동산 재벌 1세대다. 그가 축적한 부를 유지하기 위해 법조계 인재를 키우는 것은 의 인물들이 권력과 결탁한 방식과 닮아 있다. 요컨대 은 돈에 대한 욕망이 제일 큰 성장 동력이던 개발 시대에서 출발해, 그 욕망이 다시 노골적인 방식으로 전시되기 시작한 외환위기 직후를 거쳐, 2013년 대한민국 현주소에 이르는 욕망의 계보를 그리려 한다.

모두가 ‘돈의 화신’ 된 이 시대

주인공 이차돈(강지환)은 ‘고아 출신 검사’라는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다. 첫 회 첫 장면으로 돌아가면, 그는 양평에서 발견된 돈다발 사건의 담당 검사가 된다. “뭔가 지독한 냄새”가 나는 그 돈의 실체는 여러 겹의 진실로 둘러싸여 있다. 이차돈은 일차적으로 그 돈이 아들을 위해 숨겨둔 이중만 회장의 재산이자, 자신이 바로 그의 기억을 잃은 아들이라는 진실과 마주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믿었던 수하에게 배신당하고 살해됐다는 것과 어머니가 그 혐의를 뒤집어쓰고 치료감호소에 갇혔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앞으로 알아야 할 또 한 겹의 진실은 이중만 회장 역시 돈으로 사람 목숨까지 사면서 부를 축적한 인물이며, 자신 또한 권력에 뇌물을 증여해 부를 쌓아온 사채업계 거물로부터 “인생 최고의 장사 밑천”으로 키워졌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그 돈다발이 숨겨졌던 어두운 땅의 가장 깊은 곳에서 만나야 할 진실은, 모두가 ‘돈의 화신’이 된 이 시대가 돌아봐야 할 욕망의 기원이어야 한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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