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상영하는 극장은 어김없이 눈물바다가 된다. 영화의 말미에 다다르면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새나오며 관객은 눈물을 훔치기에 바쁘다. 슬픔에 기초한 ‘눈물’은 파죽지세의 흥행을 이끄는 힘이기도 한데, 그 배후에는 한국 사회에 대한 대중의 무의식이 깔려 있다. 영화를 보며 흘리는 눈물에 담긴 사회적 함의와 관련해 본다면, 의 중심 화두 중 하나는 ‘우리 시대의 판사와 예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유아 유괴·성폭행·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수감된 주인공 이용구(류승룡)의 딸 예승(박신혜)은 이 두 가지 역할을 모두 떠안는다. 예승은 ‘정의의 이름으로 잘못된 판결을 교정하는 판사’면서 ‘누명 쓴 죄인 아버지를 구제하는 예수’(7번방의 죄수들은 발음이 부정확한 용구의 ‘예승’ 발음을 ‘예수’로 잘못 알아듣는다)다. 판사와 예수, 이 둘은 2013년 한국 사회가 절실히 요구하는 가치를 대변하는 환유의 캐릭터다.
엄마는 어디에 있는가?
찬찬히 그 과정을 짚어보자. 사법시험에 합격한 예비 법조인 예승의 기억을 따라 시간의 추를 돌리게 되는 시점은 1997년이다. 1997년은 우리에게 어떤 해였나? 그때는 지옥에서 보낸 한철로 기억되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에 의해 대한민국이 신음하던 세기말이었다. 세일러문이 그려진 가방을 갖고 싶어 하던 어린 예승은 이 재앙의 시기에 행해진 불의를 고스란히 체험했다. 커서는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치 않겠다’(이것은 판사의 소임을 지시하는 말이기도 하다)는 세일러문의 다짐을 몸소 실천한다. 여기서 ‘너’는 사회적 지위와 힘을 남용하는 세력이고, 응징의 주체는 정의의 사도들이다. 세일러문의 주제곡에 나오는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라는 가사는 딸의 안위를 걱정해 최후 재판에서 거짓 진술을 하고 마는 용구의 내면의 소리다. 사법연수원 모의재판으로 열리는 ‘국민참여재판’이라는 형식은 잘못된 판단을 교정하는 데 한국 사회가 놓인 현실을 일러준다. 국민에 의한 사적인 명예회복은 가능하나 이미 치른 희생을 법리적·물리적으로 회복하기란 난망한 상황인 것이다.
은 이처럼 한국 사회가 공정하거나 정의롭지 않다는 인식에 바탕하고 있다. 이 영화가 주는 쾌락은 의도된 오인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에 의해 실종돼버린 정의를 회복하는 이야기로서의 카타르시스다. 그런 의미에서 은 로 이어졌던 한국 사회의 부조리와 부정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불평등 구조에 대한 공중(公衆)의 분노가 대중문화 콘텐츠에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최근 몇 년 사이의 트렌드를 반영한다. 다만 이 영화가 가진 전례 없는 폭발력은 부정한 사회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다는 대중의 무의식이 ‘분노’보다는 ‘슬픔’으로 표출됐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슬픔의 예술적 승화 형식은 ‘신파’다.
신파는 눈물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을 유발하는 장르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의 정체는 무엇인가? 답은 ‘남성의 신파’라는 이 영화의 특징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은 엄마가 종적을 감춘 가족멜로 드라마다. 통상 이런 유의 이야기에서 부모가 부재한 사연은 어떤 식으로든 설명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지적 능력이 6살에 불과한 지체장애인 용구가 어떻게 딸을 가질 수 있었는가는 설명될 이유가 충분하다. 그러나 엄마가 부재하게 된 이유는 비밀에 부쳐지고, 영화는 철저하게 남성 또는 부성의 드라마로 일관한다. 즉 존재하지 않는 모성을 부성이 대체하는 신파 드라마인 셈인데,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가 쏟는 지극한 애정 때문에 우리는 울었다. 그것은 부녀의 애틋한 소원이 무구한 교도소 담장 철망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구멍을 봉합하는 눈물이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사회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소망 충족을 대체한다. 신파가 권하는 눈물은 언제나 뻔하고 과장되고 노골적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그것은 평론가들이 작위적이고 과잉된 신파 드라마에 질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파는 일종의 제의적 향수 행위가 아니던가. 우리는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용구가 의연하게 예승과 헤어진 뒤 돌아서서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를 연발할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며 그 울음의 제의에 장단을 맞추기 위해 장전된 눈물을 발사한다.
발사된 눈물은 정의 실현을 부를까에서 사회의 정의는 완벽하게 구현되지 않는다. 기록으로 남는 재판 결과는 번복될 수 없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용구도 돌아오지 않는다. 관객이 흘리는 것은 이 바뀔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하는 자로서의 눈물이다. 반쪽 또는 불구에 그치고 마는 정의 실현을 뒷받침하는 보강제 또한 신파의 카타르시스다. 의 대흥행은 이 슬픔이 분노보다 힘이 세다는 걸 입증하고 만 것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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