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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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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거리, 청년들만의 답

이웃이 궁금했던, 인천 출신이거나 거주하는 20~30대 ‘청년플러스’… “지역 관련이면 어떤 주제든 열려 있어요”
등록 2013-02-09 20:30 수정 2020-05-03 04:27

양념에 버무려지는 닭강정, 색색의 찐빵이 유혹하지만 추운 날씨 탓인지 시장은 텅 비어 있었다. 인천 중구 신포시장 근처, 덩치 크지만 오래돼 보이는 건물, 낡은 지하철 표지판, 지하상가를 촘촘히 채운 크고 작은 가게들. 내일을 그리기보다는 옛 영화를 추억하는 편이 더 어울리는 거리였다. 그곳에서 새 그림을 그려보겠다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1월25일 오래된 시장 근처에서 젊은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 집들이를 열었다. ‘청년플러스’는 인천의 낙후한 구도심에서 이웃과 사귀고 지역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이른바 ‘열려 있는 실험실’(Open Lab)을 표방하는 청년들의 모임이다.

1월25일 청년플러스 2층 전시 공간에서 인천 출신 다큐 감독 장경희씨가 영화 ‘동구 밖‘ 상영에 앞서 관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청년플러스 제공

1월25일 청년플러스 2층 전시 공간에서 인천 출신 다큐 감독 장경희씨가 영화 ‘동구 밖‘ 상영에 앞서 관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청년플러스 제공

“내가 사는 동네에서 재밌게”

“내가 사는 동네에서 재밌게 살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이죠.” 집들이 홍보를 맡은 청년플러스 회원 이정하(25)씨의 설명이 명쾌하다. “인천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아요. 특히 우리가 모인 이곳은 생기가 사라진 지 오래된 공간이에요. 즐겁게 놀 수 있는 곳도 없고, 젊은 사람들은 자꾸만 서울로 가려고 해요.” 인천을 떠날 것을 고민하다 머물기로 다짐했다는 장경희(31)씨의 말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방송영상과 졸업을 앞둔 장씨는 졸업 영화를 준비하던 중 모교인 박문여중·고교가 송도신도시로 이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급격하게 낡아가는 동네가 앞으로 더 쓸쓸해지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헛헛했다. 주안·부평·구월동 등 한때는 반짝이다가 어느새 빛을 잃은 인천의 주요 공간을 돌이켜봤다. 모두를 황폐화하는 개발 위주의 도시 정책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담아 다큐 을 찍었다. 집들이 첫날 사람들과 다 같이 영화를 보며 학교처럼 이곳을 떠날 것인가, 아니면 침체된 도시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가며 머물 것인가 고민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사흘 동안 진행된 일련의 행사는 모두 이런 고민에서 출발했다. 인천 곳곳을 그려 만든 엽서전인 ‘드로잉 앤드 빌리지’는 66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프로젝트다. 어린이와 어른들이 소풍하듯 동네를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한 장의 사진보다 느린 속도로 완성되는 그림을 통해 사람들은 그 시간만큼 오랫동안 공간을 들여다봤다. ‘달콤, 쌉싸름한 샐러드 마을 입주식’은 한데 섞인 샐러드처럼 각각 다른 개성을 간직하되 조화를 추구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쌉싸름한’ 현실에서 ‘달콤한’ 꿈을 꾸는 청년 입주민들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청년플러스의 주체는 인천에서 생활하고 있거나 인천 출신인 20~30대다. 대체로 함께 사는 이웃이 궁금했던 젊은이들이다. 지난해 9월, 인천문화재단이 지역 문화예술과 비즈니스를 도모하는 청년 그룹을 모아 ‘빌리지 디자인 스쿨’을 열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동아리 ‘인하대 사이프’, 아마추어 밴드에 공연 기회를 제공하는 에이전시 ‘프로추어먼트’, 인천 중구 신포동을 중심으로 문화행사를 기획하는 마을기업 ‘신포살롱’, 춤으로 청년문화를 기획하는 ‘J컴퍼니’, 한복을 알리는 청년 동아리 ‘한복놀이단’, 부천 지역 청년문화기획단 ‘문화사냥단’, 고물의 재발견을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꿈꾸는 ‘보물상’, 배움터 기획 집단인 ‘부평은대학’, 폐현수막으로 옷을 만들어 파는 ‘최고의 환한 미소’, 인천 중구 지역 여행 코스를 개발하는 청년 회사 ‘버스토리’ 등이 모여 커뮤니티 디자인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구했다.

첫 목표는 2년 안 완전 자립

빌리지 디자인 스쿨은 한 달 정도 진행됐지만 청년들은 프로그램이 끝나고도 연합 모임을 지속했다. 알음알음 활동이 알려지며 멀리 의정부 등 다른 지역에서도 모임에 참여하고 싶다며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누구에게든, 지역과 관련한 문제라면 어떤 주제에 관해서든 열려 있는 청년플러스는 가입이나 탈퇴를 위한 절차가 없다. 그러므로 아무도 정확한 회원 수를 가늠하지 못했다. “한 60~70명쯤 되나.” 이번 집들이 행사에서 포럼 진행을 맡은 우남교(28)씨의 말이다. “운영진이나 회장도 없어요. 이름 대신 별명으로만 불리는 회원도 있어요.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체계를 굳이 옮겨올 필요가 있나요. 평등한 관계에서 자유롭게 활동해요.” 옆에 앉은 이슬기(27)씨도 한마디 거든다. “우리들만의 답을 찾아보겠다는 건강함이 있는 모임이에요. 이런 행사가 열릴 때는 역할이 있지만 평소에는 의무나 할 일이 주어지진 않고요. 그냥 이 안에서 각자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면 돼요.”

인천문화재단의 후원으로 공간을 마련한 청년플러스의 첫 목표는 2년 안에 완전히 자립하는 것이다. 현재는 1층에 카페, 2층에 전시 공간을 마련했다. 수익 모델을 만들기 위해 여러 차례 실험을 거듭할 것이다. 이날 집들이를 연 공간은 수십 년 전에 웨딩홀로 쓰던 곳이었단다. 화려한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황폐해진 곳에 청년들이 들어와 온기를 채워넣었다. 신포시장 근처 유난히 불이 밝은 작은 공간이 눈에 띈다면 그곳이 아마 청년플러스의 모임터일 것이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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