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별로 없어. 빨리 끝낼 거야. 게다가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거라고. 알겠어? 느끼지 마. 그랬다간 네 엉덩이를 때려주겠어.”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주저함이 없는 27살의 억만장자 크리스천 그레이와 를 좋아하는 영문학도 아나스타샤 스틸의 이 사랑 이야기는 미국에서만 2천만 부가 넘게 팔렸다. 지난 3월 미국에서 발간된 E. L. 제임스의 ‘그레이’ 삼부작은 전자도서와 종이책 양쪽에서 판매 기록을 세우는 중이다. 인터넷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시리즈 첫 권인 는 한국 발간 직후 단숨에 종합 베스트셀러 2위에 진입했으며 전자책 판매는 1위를 기록했다. 8월 현재 한국에서 과 더불어 가장 ‘핫’한 신간이다.
야해? 왜 그렇게 많이 팔렸어?
영국의 신인작가 E. L. 제임스는 로 출판사들에 퇴짜를 맞았다. 그는 전자책으로 돌파구를 찾았고, 판매 기록을 세우고 종이책 출간에 성공했다. 영국에서 전자책 판매세가 사회적 현상이 된 지난해, 이 책의 성공은 어디까지나 ‘남들 앞에서 볼 수 없는 책’을 단말기라는 보호막 뒤에서 소비할 수 있게 한 기술 발전 덕분이라고들 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대학 졸업반인 아나스타샤 스틸은 젊은 부호를 인터뷰하게 된다. 젊을 뿐만 아니라 잘생긴 이 남자는 스틸을 한눈에 매료시킨다. 그의 구애에는 “나는 마음과 꽃을 여자에게 바치는 그런 남자가 아니야. 내 취향은 아주 독특하지. 넌 나를 멀리해야만 해”라는 경고가 붙는다. 그레이가 원하는 것은 ‘BDSM’(결박(bondage)·훈육(discipline)·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이고, 그는 플레이를 위한 합의서를 내놓는다. 그는 ‘바닐라 섹스’(보조장치가 없는 직접적인 섹스)를 해본 적이 없다.
이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가는지는 책을 읽을 당신을 위해 남겨두겠다. 하지만 몇 가지 질문에 답할 수는 있다. 이 책에 대해 내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야해?”였고, 그다음이 “왜 그렇게 많이 팔렸어?”였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클릭 한 번으로 온갖 종류의 음란물을 접할 수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단순히 노출이나 성행위를 묘사하는 수위가 책의 판매고만큼 ‘최고’라고 할 수는 없다. 두 번째 답은 이제부터 이야기해보자.
‘그레이’ 시리즈에는 별명이 하나 있다. ‘엄마들을 위한 포르노’. 최근 10여 년간 여성을 주요 타깃으로 한 소설 중 어떤 베스트셀러가 탄생했는지 살펴보면 그 말의 뜻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1996년 가 도시 독신 여성의 우울한 현실을 두 남자와의 관계로 돌파하는 사정을 코믹하게 그려냈다면, 2003년 는 사회에 새로 편입된 젊은 여자가 여자 상사·멘토와 관계 맺는 과정을 로맨스보다는 사회적 신분 상승과 자아실현이라는 코드에 중점을 두고 탐색했다(덕분에 젊은 여성을 겨냥한 ‘칙릿’이 출판계에서 대유행했다). 이 두 소설은 현실의 여자가 사회에서 살아가며 일과 사랑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난제를 주요 갈등으로 설정했는데, 2005년 시작된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10대 소녀와 뱀파이어의 사랑을 그린 판타지였다. 여기서는 욕망이 아닌 사랑이 더 중요하고, 그 순수함이 선풍적 인기의 배경으로 지목받았다. 엄마와 딸이 함께 읽는 로맨스의 매혹은 섹스가 너무 쉬워진 현실에 고전적 낭만을 되살렸다. 그리고 역시나 할리우드에서 영화화가 결정돼 현재 캐스팅 단계에 있는, 2012년의 가 있다.
완벽한 삶에 더한 새로운 방식의 섹스
이 책은 엄마와 딸이 아닌, 바로 엄마 자신을 위한 것이다. 자아실현을 추구하던 ‘배운 여자’들이 ‘엄마’가 되고, 사회적 성공과 가족의 이상적 행복을 위해 노력하던 여자들이 ‘나’의 성적 욕망을 들여다본다. 이 책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성인용품 판매도 급증해 영국에서는 특정 자위기구 판매가 400% 신장했고, 미국에서는 이 책 덕에 출산율이 높아질 거라는 전망도 나왔다. 완벽한 삶에 더한 완벽한 섹스, 그리고 새로운 방식의 섹스를 가능하게 하는 안전한 교본. 같은 BDSM을 소재로 하는, 마찬가지로 여자 작가인 폴린 레아주의 <o>와 비교해보면 이 책이 얼마나 안전한 범위 내에서 ‘도구’를 사용하는지 알 수 있다.
애석하게도, 이 책은 전통적인 할리퀸 로맨스들이 갖고 있던 클리셰를 피해가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게 이 책의 성공 요인일 것이다. 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에 매번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폭발적인 섹스가 더해진 로맨스다. ‘주인님’이라고 불리고 싶어 하는 남자는 여자의 생활까지 완벽하게 통제하고 싶어 하는데 그녀가 저항하는 것이라고 해봐야 남자가 사주는 아우디 승용차를 받기가 꺼려진다고 투덜대는 정도다. 아나스타샤 스틸은 그녀의 어머니와 언니들이(즉, 이 책의 주요 독자층인 그녀들이) 필사적으로 가장 멀리 도망가고자 했던 바로 그 지점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든다. 멍청하다고? 하지만 ‘주도적’이 될 것을 요구받고 스스로 추구해야 했던 여자들에게 효과 좋은 환상인 것만은 틀림없다. 크리스천 그레이는 속삭인다. “이 모든 결정들, 그 뒤에 있는 피곤한 사고 과정들. ‘이게 정말 해도 되는 일일까? 여기서 일어나도 되는 일일까? 지금 일어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들. 그런 사소한 것들은 하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이다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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