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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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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 떠나는 여행의 즐거움

등록 2012-07-25 15:15 수정 2020-05-03 04:26
나룻배에서 양반들이 기녀와 함께 즐기는 모습을 담은 <주유청강선유도>(舟遊淸江船遊圖·작자 미상). 글항아리 제공

나룻배에서 양반들이 기녀와 함께 즐기는 모습을 담은 <주유청강선유도>(舟遊淸江船遊圖·작자 미상). 글항아리 제공

 

“천지가 비록 넓다고 하나/ 깊은 규방에선 그 참모습 보지 못하네/ 오늘 아침 반쯤 취하고 보니/ 사해가 넓어 가없도다.”

송덕봉(1521~78)이라는 여성이 남긴 ‘술에 취한 김에 읊다’라는 시의 한 대목이다. 조선의 어기찬 가부장 권력은 여성의 여행을 가당찮게 여겼다. 부녀자의 문밖 출입이 여의치 않던 시절에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은 “사족 부녀로서 산천에서 놀이를 즐기는 자는 장(杖) 100에 처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부녀자의 여행은 ‘불법’이라는 얘기다. 송덕봉이 술기운에 기대어 천지를 그린 연유다.

 

유배길 지방 관리의 배려 

재산을 내놓아 굶어죽던 제주 백성을 살린 기생 만덕(1739~1812)에게 정조가 상을 내리려 소원을 하문했을 때 “금강산 유람”이라 답한 일이나, 부여현감을 하는 맏아들을 만나러 예순다섯 나이에 부여 첫 여행길에 오른 안동 하회 연안 이씨의 “40년 체증이 가라앉는다”는 경탄에서, 여행의 욕구를 풀 길 없었던 조선시대 여성들의 가긍한 처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엮은 일곱 번째 총서 (글항아리 펴냄)은 조선시대 여성을 비롯해, 앞 시대를 산 이들의 다종다양한 여행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별을 헤며 거닌 옛사람들의 밤하늘 여행, ‘붓 한 자루 쥐고 거대한 자연과 마주한’ 금강산 여행, 예인들의 피나는 수련과 피 끓는 득음의 길 등 13가지 갈래로 조선시대 여행의 다양한 풍경을 그리고 있다.

여행이라 했지만, 이 책에서 다룬 여행은 기쁜 마음으로 다른 곳을 둘러보는 일상적 여행의 범주에 들지 않는 이야기도 여럿이다. 죄를 얻어 먼 곳으로 처해졌던 유배길, 지방 관리를 감찰하러 가는 암행어사의 길, 영광을 찾아 떠난 고단한 과거길, 장터를 떠돌던 장돌뱅이의 유랑길 등이 그러하다. 특히 을사사화에 연루돼 경북 성주로 유배를 간 이문건을 통해서는 유배길이 죽음을 겨우 비껴간 험난한 수형(受刑)의 길만이 아닌, 지방 관리들의 배려 속에서 즐거운 유람을 떠난 길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늙고 병들면 명산을 두루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 송나라의 종병(宗炳)이 노년에 누워서 보려고 유람한 곳을 그림으로 그려 방에 걸어두었다는 일화에서 연원한 와유(臥遊)도, 오늘날의 ‘투어’와는 사뭇 다르다. 그렇게 조선시대 선비들은 방 안에 누워 그림과 글을 벗 삼아 신천지를 유람하며 노년의 풍류를 즐겼다.

예컨대 도연명의 은거를 꿈꾸는 사람은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걸어놓았고, 왕희지처럼 곡수에 술잔을 띄워 시를 짓고 싶으면 난정(蘭亭)을 그린 그림을 구해 완상했다. 와유의 그림이 상상력을 촉발하는 매개물이라고 한 성호 이익의 말뜻을 알 듯하다. 지금의 우리가 PC 바탕화면에 아름다운 사진을 띄워놓는 심사가 이러할까.

와유가 풍류와 서정의 길이었다면, 암행어사의 길은 법치와 정의의 길이었다. 그 길은 또한 명예와 고난, 이상과 현실, 성실과 기만이 엇갈리는 길이었다. 국왕의 측근 중에서 비밀리에 선발된 관원이 임금의 명령을 직접 수행하는 영광의 길이었고, 따라서 잘만 하면 출셋길로 줄달음쳐나가는 화려한 길이었다. 지체 높은 관리로서 좀처럼 겪어보기 어려운 육체적 고난의 길이었던 동시에, 헐벗고 굶주린 민초를 들여다보는 심적 고통도 아울러 컸을 목민관에게는 새로운 정치를 구상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조선사람의 조선여행> 표지.

<조선사람의 조선여행> 표지.

 

정치적 시험장이었던 사도세자의 온천여행 

가난한 백성을 긍휼히 여긴 사도세자의 온천여행길도 목민관의 그것과 비슷했다. 다리에 난 창질을 치료하러 온양으로 가는 길. 그는 백성에게 끼치는 민폐를 줄이려 부단히 애썼다. 농사철에 부득이 수레를 움직여 벼를 상하게 할까 염려했고, 병졸들의 말이 밭을 밟아 농사를 망친 농민들에게는 콩 한 섬을 지급했다. 병들어 누워 있던 마을의 한 노파에게 쌀과 돈을 내리기도 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이런 행실을 관찰사로부터 모두 보고받고 있었다. 사도세자의 행차는 왕세자의 됨됨이를 시험하고 그를 맞이하는 백성들의 수를 통해 왕조에 대한 신뢰를 가늠하는 장이었던 셈이다. 영조에게 그것은 종묘사직을 계승해나갈 왕의 방도(길)였는지도 모르겠다.

화려한 도록이 ‘와유’의 맛을 더해주는 의 뒷부분은 조선을 넘어 일제강점기에까지 걸쳐 있다. 일제강점기 망국의 울분을 단군의 실재를 증명하는 백두산 여행으로 극복하려 했던 최남선의 이야기나, 일제 교육정책의 일환으로 등장한 수학여행의 씁쓸한 탄생 배경, 소설가 박태원이 경험한 경성의 모습과 도시 생활의 단면을 읽고 있자니, 문득 우리의 역사가 때론 화사하지만, 대개는 고되고 쓸쓸한 여행길이었던 것만 같다.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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