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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 선 변방 “이왕에 맞짱 한번 뜨자”

광주 5·18 다룬 <일어서는 사람들> 공연으로 시작한 변방연극제, 7월20일까지 서울 일대에서 펼쳐져
등록 2012-07-11 17:13 수정 2020-05-03 04:26
오월 마당굿 단원들이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14회 서울변방연극제‘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전라도 마당굿을 공연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오월 마당굿 단원들이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14회 서울변방연극제‘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전라도 마당굿을 공연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둥둥둥둥. 북이 울린다. 7월4일 저녁 6시, 이곳은 서울 한가운데 종로구 광화문 광장의 끝자락. 경복궁과 저 멀리 청와대를 정면으로 마주한 자리에서 북, 꽹과리, 징, 장구 소리가 한데 어우러진다. 7월4~20일 서울 일대에서 열리는 제14회 변방연극제의 개막작 이 시작되자 어제는 광장이던 공간이 오늘은 무대로 화했다. 행인은 관객이 되었다. 길을 지나다 무대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일팔의 어미가 추는 슬픔의 춤에서 절정

등에 혹을 진 아낙과 한쪽 다리를 저는 사내가 익살맞은 표정으로 무대에 선다. 이내 눈이 맞았다. 아들을 품었다. 어느 해 음력 5월18일 아낙은 죽기 직전의 고통으로 아이를 낳았다. 사내가 어화둥둥 아들 자랑에 나선 사이에도 아낙은 한참을 쓰러져 있더니 아들이 곁에 오자 드디어 얼굴에 웃음을 띤다. 부부는 관객과 한참을 씨름하며 이름짓기에 열중하다가 음력 18일에 태어났으니 일팔이라 부르자 한다. 성은 오, ‘오일팔’이 탄생하던 날이었다.

아낙과 사내가 어깨춤을 추며 무대에서 사라지고 분위기는 반전된다. 광주 시민들의 5월 투쟁이 시작됐다. 교련복을 입고 달려나온 고등학생, 노동자, 이제 막 결혼한 새댁이며 남편 잃은 과부까지 필부필녀가 투쟁의 대오에 섰다. 지난한 싸움의 과정은 역동적인 집단무로 압축해 표현됐다. 한판 춤이 끝나자 도청이 시민군의 손으로 넘어왔다. 도청 앞, 여전히 긴장이 서려 있지만 광주에 진짜 봄이 찾아오리라는 기대 또한 넘실댔다. 시민군들은 서로 인사를 건네며 모두가 연대했음에 벅참을 느낀다. 그리고 시시각각 좁혀오는 계엄군의 포위망을 온몸으로 느끼며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밤을 준비한다.

한편 꼽추 부부는 성실하게 공장과 야학을 오가던 아들이 5월 투쟁 이후 감감무소식이자 애를 태우다 직접 찾아나선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민군을 비롯해 대장으로 선두에 섰던 오일팔까지 계엄군이 쏜 총탄에 맞아 죽음을 맞은 다음이었다. 아들의 주검을 붙들고 오열하던 부부는 이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주검을 거둬 한데 모으니, 이들은 어깨를 겯고 마치 한 송이 꽃과 같은 형상을 만들었다. 붉은 꽃으로 산화한 이들을 하늘로 보내고 일팔의 어미는 슬픔에 젖은 채 춤을 춘다. 억울한 심정을 쓰다듬듯 몸을 움직이며 광주에 서린 한을 씻어낸다.

은 광주·전남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마당극 전문연희단체 ‘놀이패 신명’의 대표적인 마당굿이다. 1982년 초연해 1997년 개작하고 지금에 이어졌다. 그런데 왜 마당극이 아닌 마당굿일까. 개작 때부터 연출과 출연(일팔어멈 역)을 하고 있는 박강의 연출가는 “방식으로서 전통의 놀이굿이나 풍물을 주요하게 선택했고, ‘씻김’을 중요한 테마로 잡았다”고 말했다. 시민군의 죽음에 한참 동안 애도를 표하며 이어졌던 일팔어멈의 춤은 슬픈 현대사의 질곡을 조망하며 벌이는 한 조각 씻김굿이다.

이번 변방연극제의 주제는 ‘연극 없는 연극, 정치 없는 정치’다. 변방연극제 예술감독 임인자씨는 올해 주제 선정과 관련해 “연극이 정치가 되고, 정치가 연극이 되는 아이러니한 시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다”며 “연극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삶에 맞닿아 있는 질문을 새로운 형식에 담아 생각해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연극이 정치 되고, 정치가 연극 되는 아이러니

총 15편의 공식 초청 작품으로 꾸려진 이번 연극제는 전통적인 그릇에 현대사의 고민을 담으며 포스트 마당극의 가능성을 모색했던 에서 출발해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과 소통을 시도한다. 주최 쪽의 시도는 축재의 수단이나 영원의 공간이 아닌 것으로서의 집(사카구치 교헤, ), 현대 도시를 그로테스크하게 재조명하며 현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관찰(극단 서울괴담, )하는 등의 행위로 이어진다. 난민과 경계인으로서 삶의 끝에는 존경받지 못하는 죽음만 기다리는 이주민의 삶을 조명한 (샐러드), 현대 정치사의 그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개인을 그린 모노드라마 (장지연·강정식), 거대한 아스팔트 아래 갇혀 사라진 한강의 모래를 통해 잊었던 감각의 복원을 시도한 (리슨투더시티·진동젤리) 등도 흥미로운 방식으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변방연극제는 아이러니하게도 변방이 아닌 서울 한복판에서 출발했다. 청와대를 마주한 무대에 서서 박강의 연출가는 ‘이왕에 맞짱 한번 뜨자’고 생각했단다. 변방연극제 문을 연 이날 공연을 통해 회귀한 시대의 정서는 한판 씻겨 내려갔을까. 7월20일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방식의 사유를 통해 관객은 비어 있던 자신의 무대에 시대적 고민과 사유의 결과물을 촘촘히 세워넣을 수 있을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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