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은 1847년 출간된 이래 43번이나 리메이크됐다. 그중 8번이 영화였다. 만큼이나 익숙한 러브스토리다. 그런데 6월28일 개봉한 안드레아 아널드 감독의 은 남자주인공 히스클리프를 흑인 배우가 연기하는 파격을 택했다. 히스클리프 역을 맡은 제임스 호손은 이 데뷔작인 아마추어 배우다. 복수와 욕망의 주체라는 인상보다는 어딘지 겉도는 듯한 이방인이다. 이 영화의 목표는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만일 누군가의 어둠을 캐내고 싶었다면 왜 하필 ‘폭풍의 언덕’을 통해서였을까?
거부할 수 없는 침입자 히스클리프
2006년 칸영화제 수상작인 영화 로 데뷔한 안드레아 아널드 감독은 제작노트에서 “은 고딕풍이자 여성주의, 사회주의, 사도마조히즘적이면서 프로이트와 근친상간에의 욕망, 폭력적이고 강한 인간의 본능에 대한 이야기다. …가장 처음 떠오른 에 대한 생각이 줄곧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고 했다. ‘처음 떠오른 생각’이란 아마도 히스클리프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 “극단적인 아웃사이더이자 거부할 수 없는 침입자 히스클리프. 그를 위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졌어요. 여주인공 캐시는 자신이 바로 히스클리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 에밀리 브론테가 히스클리프라고 생각했어요. 아마도 우리는 모두 히스클리프일지도 모르죠.”
히스클리프는 주인 언쇼가 리버풀에서 데려온 아이다. 당시 리버풀은 산업혁명을 주도한 도시로 거리에는 실업자와 부랑자가 넘쳐났다. 카메라는 히스클리프 등에 새겨진 낙인을 비추며 그가 노예선에서 도망쳤을 것임을 암시한다. 노예 신분으로부터 산업혁명 도시에서 ‘구원받은’ 아이. 사람들은 그를 동물과 인간의 중간쯤으로 취급했지만 ‘히스 산’을 닮은 이름처럼 본래는 더없이 자유로운 존재였을 것이다.
캐서린 뒤에 붙어 말을 타고 가던 날 히스클리프는 처음으로 여자의 냄새를 맡고 체온을 느낀다. 명도와 채도를 낮춘 이 영화에선 자연스레 소리가 주도권을 쥔다. 바람 소리를 타고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숨소리도 끝없이 이어진다. 캐서린이 히스클리프와 함께 진흙탕을 뒹굴고 매질당한 상처를 핥아줄 때 히스클리프는 커다란 욕망을 품게 된다. 강아지가 어미 개에게 매달리는 본능적인 욕망이다. 지난 6월27일 서울 KU씨네마테크에서는 영화 을 통해 ‘사랑과 복수의 병리학’을 이야기하는 자리인 ‘시네마 테라피’가 열렸다. 이날 강연을 맡은 건국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 하지현 교수는 “히드클리프는 동물적인 모성을 사랑으로 여기고 집착했다. 그는 성장이 멈춰버린 어른-아이다. 워더링 하이츠로 다시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소년 시절의 행동을 하며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다. 첫 번째 사랑의 경험에 매달리는 사람들 내면에 숨어 있는 아이의 모습이다”라고 했다.
히스클리프에게 캐서린은 어머니고 연인이며 마녀다. 에밀리 브론테가 소설을 썼을 때 아일랜드 민담 속에 나오는 통곡의 요정 ‘밴시’의 이야기가 상상력의 원천이 됐다고 한다. 밴시는 한밤중에 누군가 죽을 때 나타나 통곡을 하는 여인이다. 모자가 달린 회색 코트나 시트를 감고 나타나 임종에 처한 사람들의 피로 얼룩진 옷을 빤다. 영화 곳곳에서 들리는 낮은 노래 소리, 널빤지가 부딪치는 소리, 짐승들의 구슬픈 외마디 소리는 캐서린의 소리 같기도, 밴시의 소리 같기도 하다.
캄캄한 밤의 세계, 여기는 어디인가
캐서린은 왜 히스클리프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영화에서 캐서린은 넬리에게 린튼과 결혼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마를 가리키며) 여기서, (가슴을 짚으며) 또 여기서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거래.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캐서린의 영혼은 히스클리프다. 산더미만 한 무의식이다. 낯설고 야만적인 참모습이다. 캐서린이 죽은 뒤 살아남은 무의식, 히스클리프는 죽은 토끼, 뼛조각, 바람만 스산한 언덕을 밤새도록 배회한다. 안개에 묻힌 언덕, 비와 바람 앞에 엎드린 집, 작은 등불 따위는 날아가버리는 캄캄한 밤의 세계. 이곳은 어디인가?
영화 이 빚어낸 어둡고도 거친 세계는 소설의 무대인 ‘워더링 하이츠’를 날것으로 카메라 앞에 부려놓았다. 그런데 이 극사실적인 자연의 세계는 어쩐지 현실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이곳은 진흙과 피로 얼룩진 누군가의 마음 속일지도, 다른 세상일지도 모른다. 사후 세계처럼 우리 의식 밑바닥에 도사린 어두운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캐서린은 죽기 전 “황야의 바람을 마음껏 들이켜고 싶어”라고 외친다. 히스클리프는 마지막으로 “내가 원하는 천국은 여기다”라고 선언한다. 영화 후반부는 그 천국의 살벌한 풍경을 드러낸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천국이 있다. 크레디트가 올라간 뒤 돌연 나오는 마지막 장면은 지옥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에 가깝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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