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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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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 울려퍼진 ‘살인자 찬가’

불법 감금·고문 피해자만 5만명 양산한 칠레 독재자 피노체트,
2010년 우파 집권 뒤 복권 움직임
등록 2012-06-21 20:02 수정 2020-05-03 04:26

지난 6월10일 오전 칠레 수도 산티아고 중심가 마이푸 지역에 자리한 카우폴리칸극장 주변이 긴장감에 휩싸였다. 이날 오전 11시로 예정된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의 시사회 탓이다. 이그나시오 세헤르스 감독이 제작한 이 영화의 제목은 ‘피노체트’였지만, 칠레 현지에선 이렇게 불렸단다. ‘오메나헤 아 피노체트’(피노체트 찬가).

무덤 훼손 우려해 화장 원한 피노체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킨 때는 1973년 9월11일이다. 이후 칠레는 긴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칠레 정부가 내놓은 공식 기록으로만, 피노체트 치하에서 3천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 가운데 1200여 명은 여전히 ‘실종’ 상태다. 불법 감금·고문을 당한 피해자만도 줄잡아 5만 명에 이른다.
17년여 철권을 휘두르던 피노체트는 1990년 ‘은퇴’했다. ‘집권 연장의 꿈’을 안고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패배한 탓이다. 독재자의 퇴장 이후 그의 수하였던 군·경찰·정보기관 간부들이 줄줄이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기소됐다. 현지 디에고포르탈레스대학 인권연구소가 지난 6월9일 내놓은 자료를 보면, 독재가 막을 내리고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재판이 진행 중인 인권유린 사건이 350여 건에 이른다.
피노체트는 2006년 12월10일 오후 2시15분께 칠레육군병원 중환자실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91살을 일기로 숨을 거뒀다. 전직 대통령이 사망했는데 칠레 정부는 공식 애도 기간을 선포하지도, 국장으로 예우하지도 않았다. 무덤이 훼손당할 것을 우려한 피노체트가 생전에 바라던 대로 주검은 화장됐다. 당시 등 칠레 언론들은 “유가족들은 피노체트의 유해를 군부대에 안장하기를 원했지만, 군 당국이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고 전했다.
칠레 대법원이 피노체트가 권좌에서 물러나며 받아챙긴 ‘면책특권’의 일부를 박탈하는 결정을 내린 것은 그가 숨지기 넉 달여 전이었다. 이에 따라 고문·살인 등 인권유린과 공금횡령 등 부패 혐의에 대한 수사가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숨을 거두기 전까지, 독재자는 단 한 차례도 법정에 서지 않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1990년 민주화 이후 좌파연합인 ‘콘세르타시온’이 네 차례 잇따라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2010년 치러진 다섯 번째 대선에선 민족혁신당(RN)과 독립민주연합(UPI)이 주도하는 우파연합인 ‘변화를 위한 연합’에 패배했다. 재벌 출신인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이 이끄는 집권연정엔 피노체트 정권에서 ‘잘나가던’ 인물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다. 변화라면 변화였다.
그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지난 1월 초 벌어졌다. 칠레 교육부에 딸린 국가교육위원회가 내놓은 초등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을 두고 논란이 벌어진 게다. 현지 영자지 는 지난 1월6일치에서 “위원회는 피노체트 시대를 일컫는 표현으로 기존의 ‘군사독재’ 대신 좀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인 ‘군부정권’으로 쓰도록 결정했다”고 전했다.

“좌파 탄압 속에 쓸쓸하게 죽어”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켰다. 조국의 번영을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경제를 살렸고, 평화적으로 정권도 넘겨줬다. 그럼에도 좌익세력의 탄압 속에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은 지난 6월10일치 기사에서 영화 의 줄거리를 이렇게 정리했다. 칠레 전역장교연합(UNOFAR)과 ‘9·11 재단’이 공동으로 후원한 이날 시사회에는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에서 장관을 지낸 인물의 손자 등 ‘외국 귀빈’도 초청됐단다.
는 6월11일치에서 이날 시사회에 1200여 명이 참석했다고 전했다. 이들은 피노체트가 화면에 등장할 때마다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울렸단다. 같은 시각, 극장 밖에선 3천여 명의 시위대가 최루탄과 물대포를 앞세운 경찰에 맞서 2시간여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다. 앞서 인권·시민단체들의 빗발치는 시사회 금지 요청에 대해 피녜라 정부는 “민주사회에선, 어느 누구에게나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답했단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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