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에 한 번, 유럽 축구를 좋아하는 이들- 축빠(축구 동호인), 정확히는 유빠(유럽 축구 동호인)- 은 반(半)수도사가 된다. 무슬림이 라마단에 들어가는 것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인간의 기본 욕구를 스스로 제한한다. 식욕과 성욕(알 길은 없으나)은 그대로 두지만 가장 강력하다는 수면욕을 누른다. 약 한 달 동안 금욕 생활을 한다. 수면욕과 함께 식욕도 어느 정도 누른다. 평소 ‘치맥’(치킨과 맥주)을 일용할 양식으로 여기던 이들이 커피와 차를 들고 TV 앞에 다가선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현상은 복잡하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월드컵보다 재미있다는 유로(EURO)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월드컵은 ‘부흥회’, 유로는 ‘심야 집회’
유로를 맞이하는 유빠들의 마음가짐은 여러모로 종교집단과 유사하다. 괜히 수도사와 라마단을 언급한 게 아니다. 이들의 비장함을 이해하지 못하면 행동양식도 이해할 수 없다. 종교인들이 소수에게만 허락된 지극한 정신적인 평화와 구원을 얻으려면 ‘바늘구멍’으로 자신을 밀어넣듯이, 유빠도 눈의 즐거움(이른바 ‘안구 정화’)을 얻으려 잠과 싸운다. 잠을 이겨낸 자는 대지를 가르는 패스와 빨랫줄 슈팅, 그리고 고품격 헛다리짚기로 가득한 땅으로 들어갈 수 있다.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이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선민 의식도 대단하다. 마치 이스라엘인처럼, 유럽 축구의 세례를 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월드컵이 어중이떠중이도 즐길 수 있는 ‘부흥회’라면, 유로는 웬만한 이들은 제대로 즐기기 어려운 ‘심야 집회’다. 유빠들은 치열하게 대회를 즐길 준비를 한다. 디씨인사이드의 ‘해축갤’(해외축구갤러리)에 드나드는 것은 물론이고, 국내 축구잡지와 인터넷 뉴스를 섭렵한다. 외국어로 된 자료 해석에 열 올리는 이도 많다. 시시각각 발표되는 각국의 최종 명단에 일희일비하고, 전력을 평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과다. 극소수의 열성적인 이들은 직접 역사의 현장을 보려고 짐을 꾸린다. 물론 이번에는 엄청난 항공료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살벌한 인종차별 일화에 많은 사람들이 인천공항이 아닌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택했다.
신의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듯, 유빠들도 자신의 준비 상황을 타인에게 알린다. 차이라면 불특정 다수가 목표라는 것이다. 이들은 축구 게시판과 인터넷 기사의 댓글, 그리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양동작전을 펼친다. 한편으로는 자신과 같은 유빠를 규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지몽매한’ 일반 팬을 훈계하는 모양새다. 예를 들어 ‘유로 2012’에 참가하는 프랑스의 선수 명단이 발표되면 “요앙 구르퀴프를 뽑지 않은 로랑 블랑 감독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 지네딘 지단 이후로 프랑스 예술축구에 화룡점정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선수인데…” 같은 글을 남기는 것이다. 구르퀴프가 ‘가장 섹시한 프랑스 남자에 뽑힌 적이 있고, 지롱댕 드 보르도의 극적인 리그앙(프랑스 프로축구 리그) 우승을 견인한 것’을 알 턱이 없는 ‘일반인’들의 반응은 무관심에 가깝다. 선지자는 외롭고, 인자는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법이다.
대회가 시작되면 치열한 ‘율법 해석’이 시작된다. 경기가 끝나면 올라오는 인터넷 기사에는 각자의 경기 분석이 댓글로 달린다. 상대방의 해석에 동조하거나 비판하는 댓글이 그야말로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늘의 뜻을 전하는 ‘대천사장’ 조석의 가 올라오면 그야말로 엄청난 ‘교리 논쟁’이 벌어진다. 조석의 숨은 뜻과 복선을 모두 해석한 이는 공식적으로 선지자 대열에 올라선다.
행동의 변화도 일어난다. 금주 선언과 성공 사례가 잇따른다. 거의 모든 경기가 새벽에 벌어지기 때문이다. 음주는 곧 ‘불경’(不敬)이다. ‘한 달 동안 금주’라는 메신저 대화명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술은 잠시 기쁨을 주지만, 아름다운 경기는 평생 동안 간직할 자부심을 준다. 그래서 대회 기간에는 ‘간증’이 줄을 잇는다. “독일과 포르투갈 경기를 보려고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마음에 둔 그녀에게 전화가 왔어. 술 한잔 사달라고 말이야. 고민 끝에 정중하게 거절했지. 연락은 다시 오지 않았지만, 호날두의 ‘불꽃슛’을 봤으니 괜찮아.” 결승전 윤곽이 나올 때쯤이면 세상의 고민을 뛰어넘어 스스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
한 달간의 짜릿한 ‘키쓰’의 기억
극적인 변화는 후유증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한 달을 유럽 시차로 살아온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한국 땅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직도 로빈 판 페르시의 결승골이 눈 앞에 아른거리지만, TV에서는 생방송이 아닌 하이라이트, 재방송만이 흘러나온다. 정신을 차려보면, 한 달이라는 시간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부모님에게는 불효자, 친구들에게는 왕따, 무엇보다 마음에 품었던 그녀에게는 ‘오타쿠’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후회하는 이들이 속출하지만,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이들도 있다. 다시 오실 임을 기다리며 한 달간의 짜릿한 ‘키쓰’의 기억을 삶의 동력으로 삼는다.
유빠들이여! 필자의 글에 분노하지 마시길. 그대들에 대한 글을 쓰며 낄낄거리면서도, 지금 이 순간 유럽과 가까운 카타르에 출장 온 것을 ‘축복’으로 여기고 있다. 시차 적응 없이 유로 2012를 볼 생각에 부풀어 있다! 그날이 멀지 않았다.
류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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