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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줄 테니 쌀을 다오

[문화]일요일의 예술 장터 ‘동대문 봄장’ 홍대 예술가들, 동대문 진출 성공? “우리도 궁금해요~”
등록 2012-05-16 14:07 수정 2020-05-03 04:26
‘문화게릴라’로 불리던 홍대앞 독립예술가들이 동대문에 장터를 열었다. 그들은 이제 공동체를 위한 디자인을 꿈꾼다고 했다. 사진은 ‘동대문 봄장’에서 머리를 자르는 미용사 빈씨와 홍익대 안상수 교수.

‘문화게릴라’로 불리던 홍대앞 독립예술가들이 동대문에 장터를 열었다. 그들은 이제 공동체를 위한 디자인을 꿈꾼다고 했다. 사진은 ‘동대문 봄장’에서 머리를 자르는 미용사 빈씨와 홍익대 안상수 교수.

지난 5월6일 서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카페 같은 장터가 열렸다. 물건 파는 상인들의 옷차림새부터 예사롭지 않다. 화사한 원피스에 커다란 분홍색 꽃을 머리에 꽂은 이들은 장터에서 열릴 무대에 오르려나 했더니 알고 보니 손으로 만든 액세서리들을 팔려고 왔단다. 모시 원피스 차림의 미술작가 달분씨는 한복 좌판을 열었다. 한복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으로 만든 가방이며 카네이션 꽃들이 장터에 화려한 수를 놓았다. 장터 한쪽 구석에 비즈를 엮어 만든 것들을 부려놓은 토니는 자메이카에서 왔다. 작업장이나 공연장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독립예술가들이 한데 섞인 이날은 ‘동대문 봄장’이 처음 문을 여는 날이다.

<font color="#991900">10초 초상화와 낭만미장원</font>

오후 4시쯤 ‘길놀이’가 시작되자 좌판을 대신 지켜주기도 하고 손님들 말상대를 하느라 손님인지 주인인지 통 구별이 가지 않던 밴드 ‘윈디시티’의 김반장이 노래를 불렀다. 상인이자 예술가인 이들은 물건에 이야기를 덤으로 얹어 판다. 서울 홍익대 앞 산울림 소극장 1층에 있는 카페 ‘수카라’의 주인 김수향씨는 손님이 들고 온 역사책 한권과 아이스티 한잔을 바꾸기도 했다. 김수향씨는 카페에서 하듯 생활협동조합이나 직거래장에서 사온 재료로 차를 만든다. 유기농 먹거리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모임 ‘운짱’도 전국 각지를 돌며 사온 산양유며 감귤주스로 손님을 끌었다. 이날의 최고 인기 상품은 장재민씨의 ‘10초 초상화’였다. 쌀 10g을 들고 그를 찾으면 10초 만에 뚝딱 초상화를 그려준다. 바로 옆에 있던 삶디자인 활동가 박활민씨가 나뭇가지로 만든 ‘피스버드’는 단 4개, ‘한정 상품’이다. 쌀 4kg을 들고 오면 바꿔 갈 수 있다. 독립잡지 을 만든 이들도 ‘자신감 회복 프로젝트 2호’를 들고 나왔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예술을 쌀로 바꾸는 ‘쌀티스트’에 참여하고 있다. 박활민씨는 장터 개시를 앞두고 블로그에 “작품을 줄 테니 쌀을 다오”라는 글을 올렸다. “시장경제에선 사람들이 돈 때문에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잖아요. 마이클 샌델의 책 을 보며 우리는 돈이 아닌 걸로 거래하며 만남을 활성화할 수 없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10초 초상화’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 ‘낭만미장원’에선 서울 이화여대 앞에서 미장원을 운영하는 빈씨가 가위와 보자기만 들고 손님을 맞았다. 빈씨는 가끔 오토바이에 ‘낭만미장원’이란 깃발을 달고 여행을 한단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 머리를 잘라주는 것을 즐긴다. 옛날 공원에서 이발사가 머리를 잘라주던 풍경을 좋아하는 그에게 안성맞춤한 장터다. 이날 ‘낭만미장원’에서 안상수 홍익대 교수도 머리를 잘랐다.

<font color="#991900">명품 시장 옆에 삶을 담은 시장 개설</font>

‘동대문 봄장’은 예전 홍익대 앞에서 예술가들의 독립시장인 ‘희망시장’을 주도하던 사람들의 작품이다. 얼마 전 서울디자인재단을 맡은 안상수 교수는 독립예술가들이 홍익대 앞을 아지트 삼아 활동하던 시절, 그 문화의 싹을 틔운 사람 중 하나로 알려졌다. 전부터 그와 한데 어울리던 이들이 동대문에 새로운 시장을 열자 했다. 시민참여 연구소 ‘희망제작소’에서 일하는 정용철씨가 “장터에서 거둔 기금은 또 다 함께 쓰는 시민 시장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문화기획자 김상윤씨는 “시장도 없고 자립 통로도 막혀 있는 예술가들에게 동대문에 장터를 열어주자”며 생각을 보탰다. 말하자면 홍익대 앞 독립예술가와 시민활동가들이 동대문에서 만난 셈이다. ‘동대문 봄장’ 대표를 맡은 조윤석씨는 홍익대 앞에서 희망시장을 만들었던 사람이다. “많이 파는 사람이 못 파는 사람을 돕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팔고, 이렇게 시장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실험이죠. 디자이너들 처지에서는 사회와 소통하는 길을 찾으며 사회력을 키워보자는 생각이고요.”

왜 하필 동대문일까?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주도한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파크’ 건설 계획이 불을 댕겼다. 이들은 명품 디자인만 담는다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공사 현장 옆에서 삶을 담는 진짜 디자인 시장을 만드는 방법을 모의하는 중이다. 김상윤씨는 “동대문 상인들과 연계해 동대문에서 파는 그릇이나 옷을 홍익대 앞 예술가들이 디자인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다. 미술가들이 주도했던 홍익대 앞 문화는 소비주의에 발목 잡혀 추락하는 중이라며, 동대문의 자원을 이용한 ‘로컬 디자인’ 시장에서 새롭게 시작해보자는 뜻이란다.

<font color="#991900">‘디자인 서울’ 계획 수정에 맞춤한 자리</font>

동대문시장은 한국에서 가장 큰 도매 상권 중 하나다. 을지로에서 황학동까지 치면 값싸고 이름 없는 물건이 넘쳐나는 재래시장의 모습을 아슬아슬하게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건축가이기도 한 조윤석 대표는 “대형 건축물을 세워 역사적·사회적 형성물들을 손쉽게 지우려던 ‘디자인 서울’ 계획을 수정하기에 맞춤한 상징적인 자리라고 생각한다”며 “홍익대 앞 문화 게릴라들이 사회적 역량을 형성할 수 있을지 우리도 궁금하다”고 털어놓았다. 디자이너 15명으로 출발한 ‘동대문 봄장’은 매주 일요일 열린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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