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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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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아버지 30년 만에 통하다

아버지 대신 복수의 여정을 떠난 남자, 트라우마를 쓰다듬으며 화해의 여로로 돌아오다… 숀 펜 주연의 <아버지를 위한 노래>
등록 2012-04-28 15:56 수정 2020-05-03 04:26

수컷들의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가장 유서 깊은 싸움은, 아버지의 질서에 대적하는 아들 세대의 모반이다. 세대론 관점에서 풀이하면, 아들은 아버지 삶의 자취와 방식, 가치를 부정하는 세대 혁명을 통해 새 시대의 주역으로 부상해왔다고 할 것이다. 아버지 세대를 극복하지 못하면 나의 시대도 요원해지고 말리라는 세대적 각성이 아들 세대의 행동방식을 결정한 동기였기 때문이다. 사회 공동체 내에서 빈발하는 세대 간의 쟁투가 아버지와 아들의 드잡이 싸움으로 묘사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그동안 거부해온 아버지의 트라우마를 더듬어가는 기이한 체험. <아버지를 위한 노래>의 주인공이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여행이기도 하다.

그동안 거부해온 아버지의 트라우마를 더듬어가는 기이한 체험. <아버지를 위한 노래>의 주인공이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여행이기도 하다.

‘아버지 되기’를 거절했던 남자

눈을 돌리면 이런 정반합적 세대 이행 법칙은 허다한 영화들에서 즐겨 묘사됐다. 출연작들 족족 절창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숀 펜의 연기로 큰 화제를 낳은 영화 는 그 전범으로 볼 수 있다.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품게 되는 거리감은 이 영화에서 ‘아버지 되기’를 한사코 거절했던 한 남자가 우연한 계기에 의해 아버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를 통해 재연된다. 영화는 30년간 소원하게 지낸 아버지의 죽음을 빌미로 그의 행적을 더듬게 되는 남자 셰이엔(숀 펜)을 좇아간다. 전직 록스타인 셰이엔은 우울한 아이들을 더욱 우울로 내모는 음악을 유포해 청년 둘을 죽음으로 이끈 뒤 아일랜드 더블린에 은둔 중이다. 그의 트라우마는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책에 기인한다. 아버지가 없어서 자신의 삶이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믿는 셰이엔은 부성의 결핍으로 인한 질곡을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숫제 자식을 낳지 않는다. 그에게 생의 전기를 제공하는 것은 임박한 아버지의 임종이다. 유대인인 아버지가 일평생 아우슈비츠에서 자신을 관리했던 나치 추종자 알로이스 랑을 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셰이엔은 부친의 완수되지 않은 미션을 승계하기로 한다.

과거가 있는 록스타의 기이한 일상이 별안간 홀로코스트의 망령을 쫓는 로드무비로 변하면서부터 이 영화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핵심은 아버지와 셰이엔의 관계다. 셰이엔이 지녔던 아버지에 대한 악감정이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되는 것도 이 추적 여행에 나서면서부터다. 30년간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한 것으로 생각했던 셰이엔은 그로 인해 아버지가 되지 않으려는, 성장을 거부하는 미성숙한 아이의 상태로 묘사된다. 아버지와 절연한 뒤 15살 때부터 폭탄 머리와 눈 화장, 진한 메이크업으로 외모를 위장해온 그는 외부의 자극에 쉽게 다치는, 여린 아이 같은 심성의 소유자다. 가늘고 섬세하며 징징거리는 듯한 숀 펜의 음색은 셰이엔의 드러나지 않는 내면을 더할 나위 없이 적절히 표현한다.

미국 뉴욕을 출발해 멤피스를 기착지로 종료되는 셰이엔의 행장기(行狀記)는 복수의 여정이 아니라 화해와 반성, 발견의 여로로 궤도를 수정한다. 이 여정에서 그는 나치 관리인 알로이스의 아내이자 역사 교사(역사의 대역죄인이 역사를 가르치는 아이러니!)인 도로시, 그들의 딸 레이철, 레이철의 어린 아들 토머스를 차례로 경유한다. 혈족의 끈끈한 유대를 거의 포기했던 이 사내는 아버지의 트라우마를 더듬으며 기이한 체험을 한다.

인상적인 한 장면이 있다. 아버지 되기를 거절했던 셰이엔이 역시 부성 결핍 상태에 놓인 소년 토머스의 집에 머물며 마치 그의 아버지라도 된 듯, 버려두었던 기타를 잡고 소년을 위해 연주를 해주는 장면이다. 이 신에서 그는 완벽한 ‘유사-아버지’의 형상으로 재현된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원수들과의 만남에서 뜻밖의 화해 무드가 조성되는데, 아버지의 미완성 과제를 통해 그 자신이 상처를 치유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을 종단하는 이 여행을 통해 셰이엔은 마음속에 분노가 가득 차 있으면서도 내색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 아버지의 이면을 보게 된다. 그 스스로가 씻을 수 없는 과거의 상처로 인해 동굴 속에 웅크린 채 살아왔던 것처럼. 동시에 의도치 않게 무고한 청년 둘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그는 ‘떨쳐지지 않는 자신의 죄의식과 아버지의 인생을 망가뜨린 나치스트의 전쟁범죄가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느낀 듯하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일부

따라서 셰이엔의 문제 해결 방식은 나치 사냥꾼을 고용해 원수를 찾아헤맸던 아버지의 그것과 사뭇 달라 보인다. 이름을 바꾸고 외지에 은거해 있는 알로이스가 그 자식에게 했던, “어떤 일이 있어도 난 네 삶의 일부란다”라는 말은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의 관계에 대해 경청할 만한 잠언처럼 들린다.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극복의 대상이기는 하되 사라지지 않는 존재의 화인(火印)이라 할 아버지. 그제야 셰이엔은 15살 이후 멀리했던 아버지를 받아들일 수 있었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자신을 감싸고 있던 위장물을 벗어던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를 부정했던 아들은 그 아버지를 극복했는가? 성장을 거부하고 아이에 머무르려 했던 이 남자는 마지막 장면에서 눈 화장을 지우고, 폭탄 머리를 정돈하고, 완벽한 그 자신의 모습으로 더블린에 귀환한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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