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2일, 우리나라의 대표적 패션 이벤트 중 하나인 ‘2012 추계 서울 패션위크’가 열렸다. 컬렉션 장소로 마련된 텐트 안에 펼쳐진 런웨이 속 모델들이 ‘하이패션’을 대변한다면, 컬렉션장 바깥에는 또 다른 런웨이가 펼쳐지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옷차림을 곁눈질하며 대화하고 사진 찍는 20대 초반 학생들에게서 패션에 대한 열기가 느껴졌다. 2012년, 젊은 남자들은 ‘화려한 옷을 입는 남자는 경박하다’는 고정관념에 구애받지 않는다. 화려한 색감과 패턴의 옷을 입은 그들은 개성을 드러내는 데 자신감이 넘친다.
일찍이 패션에 눈 뜨다
패션은 ‘스타일’만은 아니다. 사회적 메시지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는 작업이기도 하다. 비틀스가 퍼뜨린 것은 ‘모즈룩’과 ‘히피룩’의 스타일만이 아니다. 기성세대의 부조리를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어떤 태도였다. 펑크 음악과 협업 관계였던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펑크 정신을 주장하는 패션이다. 뾰족한 징이 박힌 가죽 라이더 재킷과 딱 달라붙는 본디지 팬츠,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진을 함께 붙인 찢어진 셔츠는 ‘우리는 기성세대를 따르지 않는다’는 생각 그 자체
였다. 그렇다면 지금 거리에서 흔히 만나는 장발이나 긴 부츠에 짧은 셔츠를 입고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바지에 실크스카프나 나비넥타이를 맨 20대 남자들의 패션은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일까.?
최근 20대 남자들의 옷차림을 나타내는 키워드는 거리패션과 하이패션, 그리고 대중문화와 하위문화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지방시의 로트와일러종의 개를 프린트한 티셔츠와 에르메스의 그라피티를 프린트한 재킷에다 형형색색 여러 빛깔에 발목까지 달라붙는 스키니진을 입은 모습들 말이다. 이런 과감한 패션을 퍼트린 이들은 아이돌 그룹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경쟁적으로 파격적인 옷을 걸치고 나타나도 아이돌 그룹은 어릴 적 바른 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철수와 영희를 닮았다. 사회적 이슈를 드러내는 데 패션을 이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통로는 많아졌지만, 대다수 젊은이가 ‘의견 없음’이거나 ‘노코멘트’ 하는 것과 비슷하다. 기성세대가 잘 모르는 사실 중 하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민감한 문제에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젊은이가 많다는 것이다. 이력서를 내면 기업은 지원자가 SNS에 올린 글을 보고 지원자의 성
향을 파악하곤 한다. 정보는 홍수처럼 쏟아지지만 시대 상황은 보수화하는 듯하다. 그만큼 패션은 더 ‘개인’에 집중한다. 예전처럼 패션을 통해 자신의 정치 및 사회적 견해를 드러내지 않는 추세 속에서 패션에는 저항이나 반사회적 성향도 사라졌다. ‘미의 추구’라는 탐미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로만 패션을 즐기려 한다. 패션이 시대정신을 담는 시절은 이미 저물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 사회에는 억압이 많고, 여전히 패션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어른들은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오르는 명품백을 사서 ‘샤테크’를 한다고 자기 위안을 삼고, 청소년들은 ‘노스페이스 계급장 놀이’를 하며 패션 뒤에 숨은 돈과 계급의 문제를 일찍부터 탐색한다. 그러나 젊은 세대의 새로운 경향은 패션을 단순한 개인의 ‘취향’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패션에서도 가장 큰 변화의 시발점은 인터넷의 보급과 확산이었다. 굳이 외국 출장을 가거나 컬렉션북을 사지 않아도 패션 전문가 못지않은 고급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유튜브나 블로그에도 정규 패션 교육을 받지 않은 1인 미디어가 등장하고 스트리트 패션은 직접 영향을 받는다. 바다 건너 트렌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서울까지 직배송된다. 인터넷 세대는 어린 나이에 패션에 눈뜬다. 부모가 사준 지루한 옷을 거부하고 자기 옷을 찾아나서기 시작하는 시점이 점점 빨라진다.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 하지 않는 세대
1990년대처럼 하나의 패션 트렌드가 1년을 지배하는 모습 또한 사라지는 중이다. 서울 홍익대 앞 길거리에는 잘 빠진 슈트에 포켓스퀘어와 커프스링크까지 찬 젊은 남성과 펑크 패션은 물론, 화려한 색과 현란한 패턴의 빈티지와 디자이너 브랜드 옷을 섞어 입은 남성이 공존한다. 그들은 서로의 패션을 부정하려 들지 않는다. 기성세대의 패션이 종종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드러낸다면, 젊은 세대의 패션은 ‘다른 것’과 ‘틀린 것’을 헷갈리지 않는다. 다양한 옷 입기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다.
시대정신이 빠진 패션은 반드시 부정적일까. 흡수와 해석에 능한 젊은이들의 화려한 패션은, 그것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데 그만큼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표현하고 드러내는 데 거리낌 없어진다는 것은, 아직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큰 변화의 시작일 수도 있다. 기성의 프레임으로 단정하고 의미를 부여하기에, 젊은이들의 화려한 패션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홍석우 패션저널리스트·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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