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되지 않으면 첫사랑이 아니다. 첫사랑 이야기가 열에 아홉, 아련한 후일담의 형식을 입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랑이 진행된 시점과 추억되는 시점 사이, 그 시간적 이격에 의해 불처럼 뜨거웠던 감정은 무심히 휘발되고, 의식의 인화지에 남는 건 기갈난 현실에 의해 윤색된 과거의 빛나는 잔해들이다.
이마에 남겨질 키스의 나비
일찍이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는 그의 짧은 시편에서 불편한 감정이 증발하고 남은 첫사랑의 자취를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네가 모르기를 바라며/ 나는 네 곁에서 떠났다/ 네 손이 어떤지 나는 모른다/ 네 두 눈, 네 머리칼이 그렇듯이/ 내 이마에 남은 거란/ 키스의 나비뿐.”(‘마드리갈 1919년’)
키스의 나비라니. 첫사랑의 떨림과 회한을 이처럼 탁월하게 포착해낸 언어가 또 있을까. 로르카의 나비는 80년 뒤 동아시아 변방의 젊은 시인에게서 다시 한번 달뜬 사랑의 표지로 눈부시게 변주되는데, 예컨대 이런 식이다. “파도의 헛된 움직임을 등진 채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어댔을 때, 담담한 얼굴로 그녀는/ 미리 자신의 이마에 남겨질 키스의 나비를 잡으려 했다/ 달콤한 입술의 악령 앞에서/ 정오의 바다 위로 은빛 햇살이 닿는 찰나처럼 그녀와 난 정지했다./ 수평선이 숨겨둔 심연 속 수만의 물고기떼가/ 폭발음처럼 흩어졌고, 저 바다가 한순간/ 우리의 눈에 고일 전 생애의 물기를 대신해주었다”(유하, ‘저 바다의 깊이’)
반면 소설가 김연수에게 첫사랑은 “모두가 깊이 잠든 밤에 몰래 들어온 도둑처럼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내 마음 깊은 곳의 빈터에 자리잡”는 감쪽같고 내밀한 감정이다(단편 ‘첫사랑’). 그 미묘한 감정선의 변화를 작가는 강렬한 회화적 이미지의 문장들로 훌륭하게 번안해냈다. “나는 앞뒤를 살핀 뒤, 크게 반원 모양을 그리며 자전거를 반대편 차로로 돌렸지. 잠시 자전거가 비틀거리면서 등에 멘 가방에서 빈 도시락 소리가 났어.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너를 사랑하기로 결심했어.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그 도시락 소리가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라도 되는 양. 그렇게 찾아온 가슴 뛰는 그 느낌 사이로 내가 첫사랑이라고 믿었던 뭔가가 찾아왔지.”
이런 첫사랑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한 대부분의 문학작품에 단골 소재가 됐다. 남녀 간의 연애, 그것도 막 영글기 시작한 풋내 나는 청춘의 사랑만큼 독자들을 완전한 감정이입 상태로 몰아가는 소재 또한 드문 탓이다. 물론 이 사랑 역시 순조로운 연애와는 거리가 멀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의 표현대로, “문학의 영토 안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사랑이라면 반드시 고통스럽고 일그러져 있어야 한다는 듯”.
벚꽃 피면 다시 만나기로 한 옛사랑
봄에 어울리는 첫(옛)사랑 이야기, 윤대녕의 ‘상춘곡’(1996) 역시 마찬가지다. 열흘 전 7년 만에 해후한 옛사랑과 벚꽃이 피면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주인공은 “그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어” 처음 두 사람이 살을 섞은 여자의 고향땅, 전북 고창의 선운사로 내려간다. “꽃이 피면 훠이훠이 그것들을 몰고 올라가 어느 날 아침 ‘당신’ 앞산에 부려”놓을 요량이다. 절집에 머무는 열흘 사이 두 사람의 사랑과 이별이 아리게 추억되고, 꽃은 상경의 시간이 닥치도록 피지 않는다. 서사를 마감하는 사내의 고백이 한없이 애잔하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멀리서 얘기하되 가까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서로의 생에 다만 구경꾼으로 남은들 무슨 원한이 있겠습니까. 마음 흐린 날 서로의 마당가를 기웃거리며 겨우 침향내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된 것이지요. …당신은 여인이니 부디 어여쁘시기 바랍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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