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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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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색된 과거의 빛나는 잔해들

유하·김연수부터 윤대녕까지 문학 속 첫사랑들…
첫사랑의 떨림과 회한을 탁월하게 포착해낸 사랑의 언어
등록 2012-04-18 11:41 수정 2020-05-03 04:26

추억되지 않으면 첫사랑이 아니다. 첫사랑 이야기가 열에 아홉, 아련한 후일담의 형식을 입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랑이 진행된 시점과 추억되는 시점 사이, 그 시간적 이격에 의해 불처럼 뜨거웠던 감정은 무심히 휘발되고, 의식의 인화지에 남는 건 기갈난 현실에 의해 윤색된 과거의 빛나는 잔해들이다.

이마에 남겨질 키스의 나비

일찍이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는 그의 짧은 시편에서 불편한 감정이 증발하고 남은 첫사랑의 자취를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네가 모르기를 바라며/ 나는 네 곁에서 떠났다/ 네 손이 어떤지 나는 모른다/ 네 두 눈, 네 머리칼이 그렇듯이/ 내 이마에 남은 거란/ 키스의 나비뿐.”(‘마드리갈 1919년’)

키스의 나비라니. 첫사랑의 떨림과 회한을 이처럼 탁월하게 포착해낸 언어가 또 있을까. 로르카의 나비는 80년 뒤 동아시아 변방의 젊은 시인에게서 다시 한번 달뜬 사랑의 표지로 눈부시게 변주되는데, 예컨대 이런 식이다. “파도의 헛된 움직임을 등진 채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어댔을 때, 담담한 얼굴로 그녀는/ 미리 자신의 이마에 남겨질 키스의 나비를 잡으려 했다/ 달콤한 입술의 악령 앞에서/ 정오의 바다 위로 은빛 햇살이 닿는 찰나처럼 그녀와 난 정지했다./ 수평선이 숨겨둔 심연 속 수만의 물고기떼가/ 폭발음처럼 흩어졌고, 저 바다가 한순간/ 우리의 눈에 고일 전 생애의 물기를 대신해주었다”(유하, ‘저 바다의 깊이’)

반면 소설가 김연수에게 첫사랑은 “모두가 깊이 잠든 밤에 몰래 들어온 도둑처럼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내 마음 깊은 곳의 빈터에 자리잡”는 감쪽같고 내밀한 감정이다(단편 ‘첫사랑’). 그 미묘한 감정선의 변화를 작가는 강렬한 회화적 이미지의 문장들로 훌륭하게 번안해냈다. “나는 앞뒤를 살핀 뒤, 크게 반원 모양을 그리며 자전거를 반대편 차로로 돌렸지. 잠시 자전거가 비틀거리면서 등에 멘 가방에서 빈 도시락 소리가 났어.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너를 사랑하기로 결심했어.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그 도시락 소리가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라도 되는 양. 그렇게 찾아온 가슴 뛰는 그 느낌 사이로 내가 첫사랑이라고 믿었던 뭔가가 찾아왔지.”

» 막 영글기 시작한 풋내 나는 청춘의 사랑만큼 독자를 완전한 감정이입 상태로 몰고 가는 소재는 드물다. 위부터 시인 유하, 소설가 김연수와 윤대녕.

» 막 영글기 시작한 풋내 나는 청춘의 사랑만큼 독자를 완전한 감정이입 상태로 몰고 가는 소재는 드물다. 위부터 시인 유하, 소설가 김연수와 윤대녕.

이런 첫사랑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한 대부분의 문학작품에 단골 소재가 됐다. 남녀 간의 연애, 그것도 막 영글기 시작한 풋내 나는 청춘의 사랑만큼 독자들을 완전한 감정이입 상태로 몰아가는 소재 또한 드문 탓이다. 물론 이 사랑 역시 순조로운 연애와는 거리가 멀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의 표현대로, “문학의 영토 안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사랑이라면 반드시 고통스럽고 일그러져 있어야 한다는 듯”.

벚꽃 피면 다시 만나기로 한 옛사랑

봄에 어울리는 첫(옛)사랑 이야기, 윤대녕의 ‘상춘곡’(1996) 역시 마찬가지다. 열흘 전 7년 만에 해후한 옛사랑과 벚꽃이 피면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주인공은 “그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어” 처음 두 사람이 살을 섞은 여자의 고향땅, 전북 고창의 선운사로 내려간다. “꽃이 피면 훠이훠이 그것들을 몰고 올라가 어느 날 아침 ‘당신’ 앞산에 부려”놓을 요량이다. 절집에 머무는 열흘 사이 두 사람의 사랑과 이별이 아리게 추억되고, 꽃은 상경의 시간이 닥치도록 피지 않는다. 서사를 마감하는 사내의 고백이 한없이 애잔하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멀리서 얘기하되 가까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서로의 생에 다만 구경꾼으로 남은들 무슨 원한이 있겠습니까. 마음 흐린 날 서로의 마당가를 기웃거리며 겨우 침향내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된 것이지요. …당신은 여인이니 부디 어여쁘시기 바랍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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