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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현실에 자막을 달다

서울 용산역에서 벌어지는 일을 묘사하고 현장에서 공유한 퍼포먼스 <가끔은 널 볼 수 있는 것 같아>, 하어영 기자의 참여기
등록 2012-04-07 11:35 수정 2020-05-03 04:26
“햄버거를 먹는 이등병이 앉아 있다.
삼성전자 텔레비전 앞 세 번째 줄이다.
규칙을 두고 천천히 씹는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그는 햄버거를 먹는 게 아니라 뭔가를 찾고 있다.
그것은 외계에서 보낸 무전기다.”
서울 용산역에 설치된 대형 TV 화면에 현장이 묘사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서울 용산역에 설치된 대형 TV 화면에 현장이 묘사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공공의 CCTV가 되어

여기까지 썼을 때, 왼쪽 어깨에 ‘2’라는 숫자(군대 마크)를 단 군인이 벌떡 일어났다. 놀란 듯했다. 무심코 자판을 두들기며 ‘그가 벌떡 일어났다’고 썼다. 위치는 금방 노출됐다. 대합실 구석에 앉은 기자를 찾아냈다. 손이 떨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국제다원문화축제 ‘페스티벌 봄’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의 지난 3월29일 현장이다.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마리아노 펜소티가 연출한 작품으로 2010년 독일 베를린을 시작으로 벨기에 브뤼셀, 스위스 취리히 등 10개국의 도시를 돌아 서울에 왔다. 참여 작가 수는 4명이다. 김연수 소설가, 강정 시인, 소규모아카시아밴드, 그리고 나 하어영 기자다. 5일 동안 이뤄지는 작업, 휴가를 내지 않고 민주노총 소속의 엄연한 언론노동자가 이 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은 두 가지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퍼포먼스 뒤 현장 기사를 쓰겠다는 기자의 ‘과욕’을 용인해준 편집장의 결단이지만, 참여자 처지에서는 퍼포먼스의 즉흥성 때문이다. 연습이 따로 없다는 점도 중요했다. (사실 2년 전 행위극(807호 기자가 뛰어든 세상 ‘사막의 폭풍에 몸을 맡기다’ 참조)을 위해 두 달간 몰래 연습에 참여하기도 했다.)

규칙은 간단했다. △서울 용산역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묘사한다. △작가는 구석에 앉아 지급받은 노트북으로 작업을 한다. △각자는 문학적인 카메라(CCTV)의 시선이다. 10m 정도 앞의 TV 화면에 자막을 단다는 개념이다. △구역이 정해져 있고, 그 안의 모든 것이 소재다. △현실에서 출발해 자신의 상상력을 입힌다. △TV 화면에 5줄만 나타나므로 가급적 이야기는 짧아야 한다. 문장도 짧아야 한다. △한 문장과 다음 문장의 시간 간격이 15초를 넘지 않도록 한다.

“현실에 자막을 단다”는 펜소티의 말을 듣고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직업은 길게 또는 짧게 벌어지는 사건과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다. 기사는 다른 말로 현실의 자막이 아닐까. 연출을 맡은 펜소티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무성영화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자막을 다는 느낌으로 해달라”고 누차 요구했다. 게다가, 김연수다. 보글보글, 허영심이 끓어올랐다. ‘소설가 김연수와 함께 작업을 할 수 있다니.’ 꽁꽁 숨겨놨던 허세가 베일을 벗었다.

노트북과 화면의 반응 등을 점검하는 한 번의 리허설 뒤 공연은 시작됐다. 현장은 펄떡였다. 문장을 두들기면 대상은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현장을 묘사하고 드러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지면이나 인터넷이라는 플랫폼을 통해서다. 그에 대한 반응을 대체로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적잖이 외면하고 때로는 무시하는 게 기자들의 일상이다.

“세 번째 줄 대학생/ 책을 보고 있다/ 야한 책이다/ 누군가 자신의 책을 볼까 두렵다”까지 썼을 때는 실제로 사람들이 그가 보고 있는 책을 흘끔흘끔 돌아봤다. 그 20대 남성이 대학생인지, 그 책이 정말로 야한지, 그리고 자신을 향한 낯선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지 알 길은 없다. 허구다. 하지만 현실과 허구가 혼합된 형태의 문장이 계속되며 용산역 대합실은 묘한 파동을 일으켰다.

본의 아니게 등장인물이 된 용산역 행인들은 때론 짜증나는 표정으로, 때론 흥미로운 표정으로 작업에 참여하거나 떠났다. 욕심을 내서 적극적으로 개입해보기로 했다. “끝줄에서 연인과 대화하던 짧은 머리의 남자/ 그는 만세를 불렀다/ 만세”라고 썼다. ‘만세!’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예쁘다’고 썼는데도 한껏 째려보는 여성도 있었다.

하어영 기자가 누군가를 관찰하는 모습. 중요한 건 현장에 자막을 달듯이 빠르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일이다. <한겨레> 박종식

하어영 기자가 누군가를 관찰하는 모습. 중요한 건 현장에 자막을 달듯이 빠르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일이다. <한겨레> 박종식

문장이 일으킨 파동과 웃음

감시카메라 대신 문학적인 시선을 빌려 문자로 그 ‘감시’를 기록하는 일에 4명은 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어렵다”(강정 시인)거나 “(예의에 어긋날까) 조심스럽다”(소규모아카시아밴드)는 말에 펜소티는 이렇게 요구했다. “공공의 CCTV는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라.” 김연수 작가는 “현장에서 오는 짜릿함이 있다”며 한껏 웃었다. 분명한 건 모두가 2시간 동안 꼼짝 않고 앉아서 15초에 한 번씩 무조건 한 문장을 올려야 하는 고된 노동에도 웃음을 잃지 않을 만큼 재미를 느꼈다는 점이다.

본인은? 이번 참여가 공간에 대한 재인식, 그로 인한 낯설게 보기, 사회적 시선·관념에서의 자각이라는 기자 개인의 성찰을 가져왔고 그것은 개인적으로 큰 선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선물은 자판 위에서 한판 신나게 놀았다는 것이다. “푸쳐핸섭!” “아쎄 용, 유쎄 산, 용, 산” 등 맞춤법과 외래어표기법은 잠깐 접었다. 기자로서의 직분을 잃은 자막이 난무했다. 사람들은 웃었고, 나도 웃었다. 이성을 상실했다. 펜소티, 쏘리.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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