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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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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행 불수레가 폭주하는 이 곳

신자유주의의 야만과 망가진 사회안전망이 낳은 살인자…
미야베 미유키의 원작을 한국 현실에서 재해석한 영화 <화차>
등록 2012-03-24 10:38 수정 2020-05-03 04:26
» 영화 <화차>는 적자생존·우승열패라는 지옥불이 타는 한국 사회의 문제 한가운데로 돌진한다. 관객이 공감하는 이유는 누구나 화차에 올라탈 수 있다는 생존 위기감 때문일 것이다.

» 영화 <화차>는 적자생존·우승열패라는 지옥불이 타는 한국 사회의 문제 한가운데로 돌진한다. 관객이 공감하는 이유는 누구나 화차에 올라탈 수 있다는 생존 위기감 때문일 것이다.

알려진 대로 의 표제를 장식한 한자 ‘화’는 꽃을 뜻하는 화(花)가 아니라 불을 의미하는 화(火)이다. 액면 그대로의 제목은 ‘지옥불로 돌진하는 수레’라는 뜻일 테지만, 델 것처럼 뜨거운 제재를 이야깃감으로 삼았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싶다. 그만큼 가 다루는 이슈는 민감하다. 미스터리 환상소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영화의 포스터만으로는 그 안에 담긴 충격적인 장면들을 상상할 수 없지만, 영화 안에는 한 사람의 인생을 황폐화하는 사채의 수렁, 개인파산, 신분위조, 토막살인, 무능한 경찰, 애통한 자결의 이미지가 빼곡히 채워져 있다. 흥미진진한 스토리는 원작을 읽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정평이 나 있었지만, 박진감 넘치는 추리 스토리라는 이야기의 매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대중의 열띤 호응은 불우한 현실 세태를 한 편의 영화에 농축했기 때문이다.

<font color="#C21A1A">시대가 만들어낸 ‘불량 인생’</font>

영화 의 시대 읽기에 담긴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영화 안에는 최근 한국 사회가 단단히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삶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 정체성, 관계의 활력이 무참히 손상되고 말았다는 뼈저린 각성이 자리한다. 영화는 어쩌다 불운해 인생의 암초에 부닥친 것이 아니라 피할 길 없는 악행의 사슬에 이끌린 사람들의 초상을 보여준다. 는 부조리와 소외가 만연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도한 범죄가 어떤 경위로 발생하며,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 어떻게 무시무시한 살인자로 표변하는가에 대한 사회학적 탐사를 제공한다. 곪을 대로 곪은 소비사회의 병폐가 거대한 재앙의 전조로 이어지는 지금 이곳에서는 부채의 대물림으로 인해 무고한 인생이 파탄에 처하기도 하고, 고객의 정보를 빼돌려 타인의 삶을 노략질할 수 있는가 하면, 자본제적 착취 사슬에 무방비로 노출된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작동해야 할 사회적 안전망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취약하다.

이 대목에서 원작과의 비교가 유익하리라 본다. 미야베 미유키의 가 묘사하는 것은 일종의 ‘파산의 메커니즘’이다. 일본의 버블 경제가 야기한 병리적 양상을 2012년 한국 사회로 옮겨오면서 영화 는 한국적 현실 안에서 새롭게 초점화한 의제들을 펼쳐 보인다. 원작 가 소비자본주의가 잉태한 피조물을 통해 일본 사회를 전면적으로 포위한 파산의 기제들을 묘파한 반면, 영화 는 한국 사회의 맥락으로 이를 끌고 들어와 담론의 폭을 넓히고 있다. 영화 가 건드리는 이슈는 방대하다. 여주인공 경선(김민희)은 자신의 고장 난 인생을 재부팅하고 말리라는 갱생의 의지를 불태우지만, 필사적으로 그녀가 위조하려던 인생마저 ‘다른 버전의 불량품’쯤으로 입증된다. 경선이 신분 세탁의 대상으로 삼은 선영은 개인파산으로 신용거래가 정지된 또 다른 불량 인생이었던 것이다. 사채와 악덕한 고리대금 사업을 방조하는 제도의 허점은 누군가의 인생을 간단히 무너뜨릴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해야 할 사회와 공권력은 우둔하거나 무능하고(사라진 여인을 찾으려는 문호(이선균)의 호소에 경찰들은 무신경하다), 남자친구 문호가 사라진 애인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경단에 가까운 사조직(비리 형사로 퇴출된 사촌형)을 동원하는 것뿐이다. 헛웃음이 나오는 설정이지만, 극중에서 가장 예민한 추리와 문제 해결 능력을 보여주는 이는 문호가 운영하는 동물병원의 수간호사다. 문제의 발생부터 해결까지 사회 안전망에 의해 보호되고 공권력에 의해 제어되는 사건은 단 한 가지도 없다.

는 하우스푸어, 허니문푸어, 베이비푸어 등등 각종 푸어(poor)들이 난무하는 신용불량의 한국 사회에 대한 침통한 기록이다. 영화 속 인물들 뒤에 어른거리는 것은 신자유주의체제에서 불변하는 빈부의 구조로, 영화 안에서 불운하게 죽음을 맞는 두 여성은 신자유주의적 경쟁 질서에서 낙오된 인물들이다. 신자유주의의 귀결은 적자생존, 우승열패(優勝劣敗)라는 야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막과 같은 삶이다. 부모에 의해 대물림된 부채 고리는 경선의 가족과 여성으로서의 자존, 미래를 남김없이 파괴한다. 부모의 부채를 떠안은 경선은 행복을 누릴 변변한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한 채 사채업자들의 겁박에 시달리고, 그런 경선이 먹잇감으로 삼은 선영 역시 희박한 성공 확률만 믿고 무작정 고향을 등진 ‘주변인’일 뿐이다. 사회적 약자인 저들이 그릇된 시스템의 네트워크(무분별한 개인정보 노출)를 타고 연결돼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게 되는 셈인데, 동질감을 느껴야 할 약자들이 쟁투를 벌이는 아이러니로부터 불구적인 시대의 증후가 절감된다.

<font color="#C21A1A"> 불안이라는 시대적 공감</font>

영화 가 문답하려는 질문은 이렇다. ‘이들처럼 당신의 삶도 지옥의 유황불을 향해 폭주하고 있지 않은가?’ 누구나 지옥행 불수레에 올라탈 수 있다는 시대적 공감은 한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그를 포위한 세계의 체제와 결부된 문제다. ‘사는 게 스릴러’인 요즈막의 세태를 반영한 영화 를 보고 공감을 표하는 대중의 무의식에 자리한 것도 이런 불안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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