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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는 바뀌어도 포지션은 그대로”

1990년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대표하는 학자로 ‘청산주의’ 비판받았던 이병천 교수가 여전히 급진적인 이유
등록 2012-01-12 04:56 수정 2020-05-02 19:26
이병천 교수                                                       <한겨레> 자료

이병천 교수                                                       <한겨레> 자료

“20년이오? 벌써 그리 됐군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노(老)교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20년 전 자신을 ‘얼치기 청산론자’로 몰아붙이던 ‘정통파’들의 소리 없는 전향에 대해서도 “이해한다”고 했다. “고민이 많았겠지요. 우리 사회의 변화 속도가 워낙 빨랐으니까.”

1992년 봄 란 총서를 출간하고, 그해 여름 학술단체협의회 심포지엄에서 ‘포스트마르크스주의와 한국 사회’란 글을 발표해 진보학계를 격렬한 논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1990년대 중반까지 박형준 전 청와대 정무수석(당시 고려대 사회학과 강사)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로 분류됐던 진보 경제학자다.

재벌비판도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연속

1980년대 안병직 서울대 교수 밑에서 한국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사회구성체 논쟁 과정에선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인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시각에 섰던 이 교수는, 1989년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을 목격한 뒤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이탈을 감행한다.

“독일의 베를린장벽 붕괴도 충격이었지만, 더 경악스러웠던 건 인민과 국가의 유혈 충돌로 번진 루마니아 사태였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세계관으론 도저히 해명이 안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병천 교수는 월간 1990년 2월호에 “동구권의 위기는 사회주의 자체의 위기이며, 마르크스 학설의 역사적 운명이 걸려 있는 중대한 사태”라는 글을 기고한 데 이어, 1991년 계간 에 ‘맑스 역사관의 재검토’란 논문을 실어 진보 진영의 지적·학문적 쇄신을 강하게 촉구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진보학계는 사회주의권 변화를 ‘마르크스·레닌주의 전통의 복원’으로 해석하는 소비에트 관변 논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 교수의 주장은 무책임한 투항주의로 받아들여졌다.

상황은 소련이 몰락하고, 마르크스주의 위기가 공식화한 뒤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1992년 한국의 ‘전통 마르크스주의’ 진영은 현실과 정면으로 대결하기보다 루이 알튀세르의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함으로써 위기를 우회하려 했다. 노동계급과 노동운동의 중심적 지위는 폐기돼야 하고, 노동·환경·여성 등 다양한 사회운동이 연대해 민주주의의 폭과 깊이를 확장·심화해야 한다는 이 교수의 주장은 성급한 청산론으로 간단히 기각됐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이 교수는 더 이상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마르크스주의에서 신속하게 이탈했듯, 이번에도 발빠른 변신을 시도하는 것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더 오른쪽으로 가지 않았다. 그가 매진한 것은 한국 자본주의 연구였다. 재벌경제의 역사를 추적하고,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비판했던 것도 그 일환이다. 이 교수는 “화두가 바뀌었을 뿐 (포스트마르크스주의라는) 학문적 포지션은 그대로”라고 말한다. “박정희 시대를 연구하는 것도 한국 민주주의의 확장과 심화를 가로막는 역사·제도적 요인을 탐색하기 위한 겁니다. 2002년 창간한 잡지 를 10년째 발행하는 것도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급진적 문제의식을 시민정치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지요.”

광주의 기억, 1987년의 환희

포스트 담론의 도입 과정에 성급함이 있었다는 지적에 대해선 담담하게 수긍했다. “유럽에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와 노동의 시민권이 확보된 뒤에 나온 것인데, 국내에 들여오는 과정에서 이런 배경적 차이가 엄밀히 논구되진 못했죠.” 경제적 이슈의 중요성이 커지는 세계화 국면에 대해 선제적 통찰이 부족했던 점도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고 덧붙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진보적 연구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냐고 묻자 뜻밖에도 “1980년 광주에 대한 죄의식과 1987년 6월의 벅찬 환희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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