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세
“오정세가 요즘 대세입니다.”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도대체 오정세가 누구야?’
2009년 아침 드라마를 끝으로 연기에서 잠시 떠나 있던 나는, 그사이 대중문화에 문외한이 돼 있었다(그래도 아이유와 소녀시대는 안다). 오정세는 데뷔 9년차인 명품 조연 배우다. (2010), (2011), (2011) 같은 영화와 (2008), (2010), (2011) 같은 드라마를 찍더니 결국 (개봉 예정)에 주연으로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우리 이름은 앙상블?
‘명품 조연’이란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명품’은 최고를 뜻한다. 조연을 하다 능력이 빛을 발하면 결국 주연이 된다. 조연이 내내 명품이라면 조연에 머물 수 없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은 삐져나오게 마련이니까. 조연은 말 그대로 ‘주연을 도와 극을 전개해나가는 사람’이다. 영어로는 ‘보조’(Supporting Actor)다. 이름은 존재를 규정한다. 조연은, 비애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조연은 주연을 능가할 수 없다. 로미오의 이름이 로미오인 것이 비극이듯이, 조연은 조연이기 때문에 비애를 겪는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코 남우주연상 또는 여우주연상을 탈 수 없다는 것이 조연의 비애다(그래서 조연상을 받는다).
김상호
에 오정세와 함께 출연한 공형진은 얼마 전 모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 제목은 ‘언젠가 톱스타가 꼭 돼볼 생각’이었다. 공형진 같은 대배우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머지 조연급의 열망이야 말해 무엇하리? 배우가 “나는 유명해지는 건 싫어”라고 말한다면 거짓이다. 주연으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나는 조연이 더 좋으니 그냥 여기 머물러 있겠소”라고 말할 배우는 하나도 없다. 조연이 때로 주연보다 연기를 잘할 수도 있지만, 배우는 결국 주연을 꿈꾼다.
명품 조연의 반열에 들어갈 남자 배우들은 성지루(의 변호사), 김상호(의 욕쟁이 화가), 박철민(의 도상구), 성동일(의 박 형사), 이한위(의 갑용), 고창석(의 양효삼) 등이다(공형진은 장동건의 절친이므로 제외).
조연의 비애란? 이를테면 앞의 ‘명품’이란 두 글자를 떼었을 때 생긴다. 바로 어제, 뮤지컬에 출연하는 후배가 내게 이런 넋두리를 했다. “그 주연 배우가 말이죠, ‘오늘은 앙상블 배우들하고 밥 먹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린 생각했죠. 아, 우리 이름은 ‘앙상블’이구나 하고.” ‘앙상블 배우’란, 주·조연 이외에 여러 가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요즘 돈 되는 뮤지컬에 주연이 되면 회당 최고 1천만원을 받는다. 한 달에 10회 공연만 해도 1억원이다. 앙상블 배우는 회당 3만원을 받는다. 그것도 수십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가야 할 수 있다.
드라마는 안 그런가? 영화도 마찬가지다. 남녀 주인공 두 사람을 빛내주려고 수많은 조연과 단역배우들이 함께(‘앙상블’(ensemble)은 프랑스어로 ‘함께’라는 뜻이다) 해야 한다. 어떤 작품도 주연 혼자 모든 장면에 등장할 수 없다. 천하의 배용준도 를 혼자 찍을 수는 없다. 그래서 “잘 차려진 상에 숟가락 하나만 올려놨다”고 설파(!)한 황정민의 주연상 수상 소감은 빛난다. 설사 그가 ‘난 내 역할을 했고, 당신들은 당신들 역할 한 거잖아’라고 생각했더라도 숟가락 하나의 메타포만은 존경스럽다. 승자독식의 현실에서 주연이 가져야 할 캐릭터는 겸손이다. 21세기 최고의 영웅은 전쟁터가 아니라 스크린 위에서 빛난다. 이때 영웅의 조건은 잔혹한 학살이 아니라 너그러운 베풂이다(그래서 주연 배우들이 가끔 촬영 스태프들에게 겨울 점퍼를 쏜다).
이한위
주연이 조연 되고, 조연이 주연 되는
이 기사를 쓰며 내가 출연했던 연극·영화·드라마 수를 헤아려보니 무려 35개나 된다. 한때는 오전에 SBS 드라마를 찍고, 오후에 한국방송 단막극에 출연한 뒤 밤에 영화 한 신을 찍었다. 마치 날품을 파는 사람처럼 ‘이곳에서 찔끔’, ‘저곳에서 힐끔’ 이런 식으로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명품이 되기보다는 소모품이 되곤 했다. 소모품은 늘 다른 것으로 교환할 수 있기 때문에 10년이 지나도 가치가 더해지지 않는다. 연예계는, 자본 논리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그 말고도 할 사람은 많아.’ 캐스팅하는 이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내 값어치는 추락한다. ‘그 말고는 맡을 사람이 없어.’ 이런 생각이 들게 만들면 내 값어치는 치솟는다. 18년차 연기자로서 깨달은 진리 중 하나는, 조연이 주연 되고 주연이 조연 된다는 것이다. 그건 인생에도 적용된다.
아마도 현재 명품 조연이 된 사람들은 한 번에 한 작품을 찍더라도 짝퉁이 아니라 진짜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리라. 네이버 검색창에 ‘김상호’를 치면 58명의 명사가 나온다. 우리나라에 김상호란 이름이 얼마나 많겠는가? 기업인도 있고 학자도 있고 독립운동가도 있다. 그중에 영화배우 김상호가 가장 먼저 나온다. 김상호란 배우 개인이 가진 유명세도 있겠지만, 그만큼 연예인은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고 관심을 갖는다는 뜻이다. 그 관심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한, 조연은 명품이다.
명로진 인디라이터·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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