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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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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산층의 드라마틱한 몰락

평범한 화학 교사 월터는 어떻게 마약 사범이 되었나…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를 통해 본 미국의 현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미래
등록 2011-11-11 10:35 수정 2020-05-03 04:26
<브레이킹 배드>. www.amctv.com

<브레이킹 배드>. www.amctv.com

2010년 9월께 미국에서 화학 박사학위를 받은 대기업의 부장이 대구에서 필로폰 제조 및 유통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지난 9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교수 스티븐 킨제이는 필로폰을 제조해 판매하는 갱단의 우두머리로 밝혀졌다. 이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실제 이야기다. 이로써 미국드라마(미드) (Breaking Bad·2008~)는 실화의 예고편이 되었다.

절망에서 비롯한 필로폰 제조

고등학교 화학교사가 필로폰을 제조해 판매하는 마약상이 된다는 불온한 이야기를 다룬 는 에미상을 비롯해 각종 영상산업의 상을 휩쓸었다. 주연 배우 브라이언 크랜스턴만 해도 텔레비전의 아카데미상인 에미상에서 2008년부터 3회 연속 최우수 주연상을 받았다. 한국의 ‘미드 폐인’들까지 끌어들인 이 드라마의 매력은 미국 현실에 대한 직설이다.

대기업 부장과 대학교수, 그리고 의 교사는 어떻게, 왜 마약을 만들어 팔게 된 것일까? 미국에서는 ‘메스암페타민’ ‘메탐페타민’ 혹은 ‘메스’ ‘크리스탈’ ‘아이스’라는 속칭으로 불리는 필로폰은 다른 마약에 비해 재료를 구하기 쉽고 적확한 화학 지식이 있으면 집에서도 제조할 수 있다. 얼마 전 대구에서 검거된 한 대기업의 부장은 32만원에 화장품 원료인 벤질시아나이드 4kg을 구입해 필로폰 2kg을 제조했는데 그 시가만 60억여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쯤 되면 중세의 연금술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하필 마약 사범을 다룬 드라마에 대중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 주인공 월터 화이트는 한때 유망한 화학연구소의 연구원이었다. 월터가 동료와의 갈등으로 연구소를 나오고 고등학교 화학교사가 된 직후 미국에 경제위기가 급습한다. 우선 살고 있는 집이 문제다. 연구원 시절에 구입한 고급 저택의 대출금은 교사의 박봉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게다가 50살 생일을 맞이한 월터는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의사는 폐암 3기의 시한부 삶을 선고한다. 절망적인 선고 앞에서 월터는 뇌성마비를 앓는 아들과 아내, 그리고 아내의 뱃속에서 아빠 없는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딸을 떠올린다. 가족에게 유산이라도 남겨주겠다며 월터가 만든 순도 높은 필로폰은 곧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고, 결국 주변의 거물급 마약조직과 엮이게 된다. 그 가운데 수시로 생명의 위협을 받지만 죽을 날을 받아놓은 이의 배짱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화학 지식은 월터를 점점 부자로, 또 조직의 거물로 만들어준다. 여기서부터 미국의 경제적 위기로 내몰린 중산층의 판타지가 시작된다. 물론 이것은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는 시한부의 판타지다.

월터의 스릴 넘치는 성장담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는 한 중산층의 경제적 고통에 시청자를 끌어들인다. 은행에 주택대출금을 갚기 위해 허덕이던 월터의 모습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 주택대출금 문제로 궁지에 몰렸던 미국인들의 모습 그대로다. 지금 한국의 ‘하우스푸어’(House Poor·집 가진 빈곤층) 또한 마찬가지다. 가난과 질병은 같이 오는 법. 암에 걸린 월터가 치료비에 짓눌린 모습도 미국인들에게는 절실한 문제다. 한국이라면 국민건강보험공단을 통해 암치료비 일부가 지원되지만, 의료보험 지원이 사라진 미국에서는 비싼 사보험에 가입한 사람들만 겨우 암치료비를 보장받을 수 있다. 약물치료와 폐절제술이 필요한 월터의 치료비는 총 17만~20만달러(약 1억8천만~2억2천만원)에 달한다. 교사 월급과 세차장 아르바이트로 겨우 주택대출금을 갚아나가는 상황에서 월터는 절망에 빠지게 된다. 덴절 워싱턴 주연의 영화 와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에서 익히 알려진 사보험 중심의 미국 의료보험 체계의 현실은 한국이라면, 결코 안방 TV에서는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는 ‘중병에 걸리면 치료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공포를 미국의 안방 TV에 다시 환기시킨다. 미드의 제작 주체들은 시청자에게 미국의 현실을 가감 없이 과감하게 제시한다.

사회구조적 문제로서 빈곤에 대한 경종

과거 한국에서 방영된 외화 속의 미국 사회는 풍요로운 선진국의 원형이었다. 하지만 시트콤부터 드라마까지 요즘 미드 속 미국 사회에는 최근의 미국 경제에 따른 상흔이 역력하다. 이번 시즌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시트콤 는 뉴욕에 사는 가난한 두 여자의 이야기다. 한 명은 아버지가 갑부였다가 금융사기범으로 수감된 상태다. 또 다른 1명은 원래부터 가난한 처지다. 와 는 적에 둘러싸인 듯한 미국의 불안한 정치·안보 상황을 상징한다.

는 개인의 빈곤을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게으름으로 치부하고 이로써 취약한 복지를 합리화하는 미국 사회에 울리는 드라마틱한 경종이다. 누구든지 언제든 어떤 계기로 사회·경제적 약자가 될 수 있지만 그들을 보호하는 데 소홀한 미국 사회에 대해 드라마를 통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화면 속에서 벌어져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현실과 드라마의 정교한 소통’은 그 산업의 역사와 규모 면에서 최고에 해당하는 미드가 터득한 성공 필살기인 셈이다. 지금 미국 사람들은 어떤 강력한 변화에 휩쓸려가고 있다. 덕분에 한국 시청자는 미드를 보며 신문을 곁들어 봐야 하게 생겼다. 미국 사회에 대한 드라마의 예고편은 점점 미국을 닮아가는 한국 사회의 예고편이 될지 모른다.

최원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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