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거대한 낙조’를 드리우고 있다. 세계 금융자본주의의 심장인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에서 울려퍼진 ‘점령하라’ 시위는 그것의 엄연한 증좌다. 기실 징후는 2008년부터 시작됐다. 그해 가을, 리먼브러더스를 비롯한 월스트리트의 초국적 금융 법인들이 잇따라 파산했다. 금융자본이 이끈 “번영은 사실 거대한 거품(버블)에 불과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로써 한 세대 이상의 세월 동안, 사회의 다른 모든 질서와 가치들 위에서 군림하던 ‘시장’이라는 교리는 치명상을 입었다. 자본주의 패러다임은 근본적 위기에 봉착했다.
구조 개혁 좌파 vs 신자유주의 우파
흔들리는 신자유주의 이후에 등장할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진보정당의 대표적 이론가 장석준씨의 새 책 (책세상 펴냄)는 신자유주의 탄생의 순간을 통해 그 이후를 조망하고 있다. “미래를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과거, 즉 역사인 까닭”이다. 저자는 말한다. “신자유주의의 붉은 노을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가 돌아봐야 하는 것은 30여 년 전에 이 시대가 시작된 사연들, 그때의 광경들이다.”
1970년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지구 곳곳에서는 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흐름과 이를 저지하려는 세력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이 과정은 전후 질서 붕괴 뒤 새로운 질서 수립을 놓고, 국유화 등 탈자본주의적 지향을 담은 구조 개혁 좌파와 신자유주의 우파가 벌인 대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1970~73년 칠레 살바도르 아옌데 인민연합 정부의 분투, 1970년대 영국 노동당의 모색과 논쟁, 1981~83년 프랑스 프랑수아 미테랑 좌파연합 정부의 시도와 스웨덴 등지의 흐름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이런 역사의 다른 가능성을 제압하고 세력을 확장해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신자유주의 태동기의 윤곽을 드러낸다. 이 책의 지구적 관점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지구적 현상인 데서 비롯되겠지만, 아울러 국민국가 단위의 정치경제 시스템이 지구 정치경제 질서와 긴밀히 조응하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읽힌다.
먼저 칠레를 살펴보자. ‘구조 개혁’ 강령을 내세운 사회당과 공산당의 선거연합(인민연합)은 집권 이후 곧바로 구리광산 국유화 등을 단행하고, 미국 정부와 초국적 자본의 간섭에 맞서 대중의 지지를 넓혀갔다. 그러나 인민의 살림살이가 나아진 것도 잠시, 구조 개혁 시행 이듬해에 칠레는 심각한 스태그플레이션에 직면한다. 자본가들은 대중을 선동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쿠데타에 성공한다. 이후 칠레는 모든 개혁이 폐기되고 통화주의(통화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책 기조), 즉 신자유주의의 실험장이 되었다.
1974년 집권 기회를 얻은 영국 노동당은 칠레와 달리 구조 개혁 좌파가 국민국가의 정치에 권력 거점을 구축하지 못했다. 1975년 유럽경제공동체(EEC) 탈퇴 입장에 섰던 노동당은 국민투표에서 패배해 더욱 입지가 쪼그라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1976년 외환위기가 닥치자 국제통화기금(IMF)은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좌파 정부의 가장 중요한 경제정책 수단이던 재정 지출 삭감을 요구했다. 논쟁 끝에 노동당 정부는 결국 이를 수락한다. IMF와 그 배후의 미국, 서독 은행가 등 새로운 지구 질서를 구축하려는 자본 진영의 승리이자 이를 주도한 화폐자본의 힘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1981년 등장한 프랑스 좌파연합 정부는 확장 정책과 국유화 정책을 결합한 구조 개혁안을 추진했다. 국민국가의 정치에 칠레 인민연합보다 훨씬 더 강력한 진지를 구축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외환시장이 문제였다. 미국과 IMF 대신 전면에 나선 서독 정부와 유럽통화체제(EMS)는 프랑스 정부가 프랑화 가치 조정을 요구할 때마다 미국과 서독의 디스인플레이션(인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 통화증발을 억제하고 재정 ·금융긴축을 주축으로 하는 경제조정정책) 기조를 따르도록 요구했다. 화폐자본의 이해를 우선적인 전략적 목표로 삼은 서독과 EMS의 요구에 프랑스 정부도 무릎을 꿇었다. 케인스주의로 대표되는 단기 수요 확대 정책은 폐기되고, 구조 개혁 시도는 중단됐다.
곳곳에 번뜩이는 문학적 감수성
이 책의 장점은 간결하고 단정한 문체에서 흘러나온다. 장석준의 글은 정치경제학을 내용으로 하는 사회과학 서적이 가질 법한 고답성과 현학성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 저자는 “‘신자유주의를 저지할 수 없었는가?’라는 물음의 답은 이미 나와 있다”며 “답은 물론 ‘없었다’”라고 말한다. 일견 허망해 보이는 이런 문답은 신자유주의라는 역사의 반동을 ‘왜 저지할 수 없었는지’를 곰곰이 따져보기 위함이다. 그래야 “앞으로 닥칠 역사적 선택의 순간에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대응할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의 의도와 쓸모는 오직 거기에 있다고 밝혔지만, 세계 좌파운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E. P. 톰슨이 아옌데에게 바친 조시를 인용하는 등 곳곳에 번뜩이는 문학적 감수성은 이 책의 의도와 쓸모를 더욱 다채롭게 한다.
결과적으로 구조 개혁 좌파는 자신들이 만든 기회를 성공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길을 내주었다. 저자는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과거의 오류를 직시하고 당시에 보여주었던 가능성을 제대로 실현하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서는 “과거 좌파 정치의 역사가 놓쳤던 정치의 또 다른 층위들을 환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국민국가의 정치를 생활 세계의 정치 및 지구 질서의 정치와 (재)접속하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그 (재)접속은 ‘사고는 지구적으로, 실천은 지역적으로’라는 모토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빠르게 뒤로 물러나는 어제의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전망 하나를 보탤 수 있게 됐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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