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걸 진즉에 잘라버렸어야 하는데 울고 불고 통사정하길래 불쌍해서 정규직 시켜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나이 먹었으면 시집이나 갈 것이지 떡하니 눌러붙어 가지고. 너 같은 것들 때문에 새파랗게 어리고 학벌 빵빵한 스물다섯 살짜리가 백수로 놀고 있는 거야.”(부장)
“결혼을 안 해? 니가 혼자 살 주제라도 되고? 직업 빵빵해서 돈이라도 잘 벌면 몰라. 니 나이에 니 학벌에 어디 가서 직장을 잡으며 뭘 해서 먹고살 건데?”(엄마)
평범한 여자의 로맨틱 코미디 개척
서른네 살 회사원 이연재(김선아)는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골칫덩어리다. 부장은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이 된 말단 사원 연재를 사사건건 무시한다. 인격모독에 직장 내 성희롱까지 골고루 한다. 엄마는 어떻게든 노처녀인 딸을 시집보내는 게 목표다. 억지로 연재를 결혼정보회사에 끌고 가 커플매니저 앞에서 연재의 ‘스펙’을 뻥튀기한다. 연재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는다. 부장의 얼굴을 향해 사표를 집어던지고, 자신의 연봉을 6천만원으로 높여 얘기한 엄마에게는 이렇게 소리친다.
“그래, 나 서른넷에 고졸에 편모야. 그게 나야, 그게 엄마 딸이야. 엄마는 그래서 내가 창피해? 내가 창피하냐고? 근데 왜 거짓말해? 연봉 2천 간신히 넘는 거 알면서 왜 거짓말해? 나 되게 열심히 살았어.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그런 날 창피해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만 그러면 안 되지!”
SBS 주말 드라마 가 첫 회 시청률 15.8%(AGB닐슨미디어리서치)를 찍었다. 마지막 회 시청률이 28%를 넘었던 의 후광 효과가 있다고는 해도 1~2회 모두 15%를 넘겼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어쨌든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는 데에는 성공했다. 의 무난한 안착은 이 드라마의 단독 주연이나 다름없는 ‘김선아 효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선아는 ‘대한민국 대표 노처녀’다. 대한민국 대표 노처녀가 전면에 등장해 사랑하고 사랑받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문화방송 (이하 , 2005)의 김삼순은 예쁘지도 날씬하지도 않은 서른 살 파티시에였다. 가난해도 예쁘고 청순한 ‘어린 것들’이 주인공이던 이전 드라마와 달리 은 외모부터 이름까지 평범한 여자 김삼순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이 땅의 수많은 ‘삼순이들’은 현실에 발을 꼭 붙이고 있는 김삼순의 사랑법에 열광했다. 김삼순을 비호감이 아닌 설득력 있는 캐릭터로 만든 건 8할이 김선아의 연기였다.
평범한 인물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김선아의 연기는 이전에 이미 빛을 발했다. 영화 (2003)에서 김선아는 비디오 가겟집 딸이자 백수인 미영 역을 맡아 뒤에 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던 특유의 능청스러운 연기, 생활밀착형 연기를 보여줬다. 김선아는 2005년 한 영화 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연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술 먹고 예쁘게 토하는 사람이 있나요? 실연당해 미쳐버리겠는데 (조신하게 옷소매를 올리고 훌쩍거리는 시늉) 이러는 사람이 있겠냐고요. 제가 지금까지 연기한 인물이 대개 우리 주변의 여자들이잖아요. 그래서 화장을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는 거고, 마스카라 칠하고 우는데 초강력 워터프루프 제품 아닌 다음에야 안 번지면 이상한 거고, 오바이트하다가 묻으면 머리칼 넘기는 거고요. 보통 여자 캐릭터들이니 비슷한 일들은 겪지만 그렇다고 결코 성격도 비슷하지는 않을 거예요.”
이후 김선아는 문화방송 (2008)와 SBS (2009)에서 역시 노처녀를 연기했다. 문화재사범 단속반 허초희 역을 맡은 는 의 후광을 지우지 못하며 기대보다 저조한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에서는 달랐다. 지방도시 시청 10급 공무원이자 30대 중반의 노처녀 신미래 역을 연기한 김선아는 뻔뻔하지만 따뜻하고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숨긴 인물을 잘 그려냈다. 을 통해 나이와 상관없이 사랑을 찾아가는 여자를 보여줬다면, 을 통해서는 나이나 직급과 상관없이 더 큰 꿈을 꾸는 여자를 보여줬다.
이 땅의 ‘연재들’이 표한 공감
는 김선아의, 김선아에 의한, 김선아를 위한 드라마다. 서른넷, 고졸, 편모, 미혼, 말단 사원. 이연재의 키워드다. 다시 말해, ‘능력 없고 학벌 없고 집안도 별로인데 나이 많고 외모는 후줄근한’ 노처녀가 연재다. 게다가 인생을 열심히 산 대가가 고작 담낭암 말기인, 그래서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사연 많은’ 여자다. 삼순이나 신미래보다 더 힘든 삶이다. 1~2회는 연재가 처한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회사 상사, 동료, 후배, 고객에게 연방 당하기만 했다. ‘설마, 저 정도일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가혹한 상황을 이어붙였지만 나이와 학력으로 차별받는 이 땅의 ‘연재들’이 존재하는 걸 알기에 연재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드라마는 3회부터 회사를 그만두고 남은 인생을 즐기려고 일본으로 휴가를 떠난 연재가 재벌 2세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로 방향을 틀었다. 인생에 마지막 꽃을 피우겠다는 연재의 결심은 이해하지만 뿔테 안경을 벗고 비싼 옷을 사입자 졸지에 ‘미녀’가 돼버린 설정에 맥이 빠지는 게 사실이다. ‘뻔한’ 판타지 로맨스가 펼쳐질 거라는 예감에 사로잡힐 시점이지만, 김선아이기에 여전히 기대를 하게 된다. 적어도 김선아가 연기하는 연재라면 보통 여자에서 갑자기 특별한 여자로 돌변해 구름에 붕 떠 있는 사랑만 하지는 않을 테니까.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영하 11도 속 헌재로 간 30만명 외침…“상식적 판단 믿습니다”
전국서 “윤석열 구속” “국힘 해체”…탄핵 가결 뒤 첫 주말 집회
현실의 응시자, 정아은 작가 별세…향년 49
퇴임 한 달 남은 바이든, 대만에 8300억원 규모 군사 원조
홍시·곶감 줄이고 식후 1~2시간 뒤 섭취 [건강한겨레]
찬 공기 달군 “윤석열 파면하라”…행인들 함께 외치며 ‘폰 불빛’ [포토]
커피 애호가 몸엔 이 박테리아 8배 많아…카페인 때문은 아니다
‘계엄 모의’ 무속인 노상원 점집…소주 더미에 술 절은 쓰레기봉투
박선원 “윤석열, 탄핵가결 전 국힘에 ‘2주 버텨달라’ 요청”
감, 면역에 좋은 천연 종합영양제 [건강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