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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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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병맛 패션을 말하다

웹툰 <패션왕>, ‘미존개오’ 정형돈, ‘꽃미남 수사대’의 격정적 옷입기… ‘트렌드’를 개그 소재 삼아 패션을 비틀다
등록 2011-07-08 18:29 수정 2020-05-03 04:26
문화방송 <무한도전>에서 '미존개오' 캐릭터로 활약하는 정현돈. 문화방송 제공

문화방송 <무한도전>에서 '미존개오' 캐릭터로 활약하는 정현돈. 문화방송 제공

머리 양옆을 짧게 치는 일명 ‘귀두컷’에 교복 통바지, ‘노스’가 아닌 ‘사우스 페이스’인 ‘짭’(짝퉁) 패딩을 입은 고등학생 우기명은 같은 반 여학생 혜진을 짝사랑한다. 반에서 ‘찐따’로 통하는 기명의 삶이 ‘EBS 청소년 드라마’라면 남학생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혜진의 삶은 ‘귀여니 인터넷 소설’이다. 기명은 혜진의 마음을 얻기 위해 멋진 남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간지남’ 우기명을 아시나요?

겨울방학이 끝난 개학날, 학교에서 가장 옷을 잘 입는 선배가 운영하는 인터넷 쇼핑몰 아르바이트생을 뽑는 면접이 열린다. 알바 면접의 주제는 ‘교복’. 첫 번째 지원자인 1학년 김창주는 머리에 헤어밴드를 두르고, 푸른색 컬러렌즈에 아이라인까지 그리고 나타난다. 많은 이들을 경악시킨 그의 교복 스타일은 발목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줄여 입은 ‘3통 스키니’ 교복 바지. 두 번째 지원자인 학교의 ‘간판 간지남’ 김원호는 배기 스타일로 수선한 교복 바지에 지드래곤(GD)이 신었다는 ‘삐에르 루부텡’ 신발을 매치한다. “기본을 지키면서 배기 핏의 팬츠로 지루함을 피했다. 그리고 하이 브랜드 스니커즈로 마무리”라는 선배의 평이 뒤따른다.

그리고 마지막 지원자. 아름다움을 위해 시각마저 포기한, 눈을 덮는 길이의 헤어스타일인 일명 ‘장님컷’을 한 남학생이 면접장으로 걸어 들어왔다. 교복에 충격을 가해 마치 청바지처럼 물을 뺀 재킷을 입은 그는 면접장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워싱 처리된 교복으로 저 소년의 시크함이 곳곳에 배어들어 극도의 핏을 끌어올리고 있다. 간지력이 계속 상승하고 있어!” 선배의 극찬 속에 ‘간지 배틀’의 최종 우승자로 ‘패션왕’이 된 그 소년은, 우기명이다.

네이버 웹툰에 연재 중인 만화 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기안84’가 그리는 은 연재일인 목요일만 되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회자되는 등 대단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은 고등학생의 성장에 관한 만화지만 많은 독자들은 만화 속에 자세하게 등장하는 패션에 대한 ‘비틀기’에 열광한다. 지난겨울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간지’의 상징으로 칭송된 ‘노스페이스’ 패딩이나 그들이 열광하는 교복 패션에 대한 내용은 너무 진지해서 웃음이 난다. 만화는 또 실제 ‘패셔니스타’로 알려진 모델이나 탤런트 등을 대놓고 만화 속 캐릭터로 그려내면서 이른바 ‘간지 나는’ 그들의 스타일을 살짝 비꼰다. 네티즌은 에 ‘새로운 병맛 만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극사실주의 웹툰’ 등의 평을 달았다.

한국방송 <개그콘서트>의 '꽃미남 수사대'. 한국방송 제공

한국방송 <개그콘서트>의 '꽃미남 수사대'. 한국방송 제공

패션 종결자가 선사한 깨알같은 웃음

“드래곤, 보고 있나?” ‘미존개오’(미친 존재감 개화동 오렌지족)라는 별명을 가진 정형돈이 최고의 패셔니스타인 ‘빅뱅’의 지드래곤을 향해 자신 있게 일갈했다. 지난 4월30일 방송된 문화방송 ‘가요제 디너쇼’에서 정형돈은 “패션이 정말 제로다” “지용아, 너는 옷이 완성돼야 해”라며 지드래곤의 패션을 신랄하게 지적했다. 지드래곤이 하고 나온 머플러 색깔과 반지 갯수까지 세세하게 걸고 넘어졌다. 정형돈이 지드래곤을 지적할 때마다 스튜디오에는 웃음 폭탄이 터졌다.

네이버 웹툰 <패션왕>의 한 장면. NHN 제공

네이버 웹툰 <패션왕>의 한 장면. NHN 제공

정형돈의 ‘패션 지적질’에는 나름의 배경이 있다. ‘대한민국 평균 남자’인 정형돈은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다. 좀처럼 입기 힘들다는 은갈치 양복에 구겨 신은 구두, 매번 메고 나오는 똑같은 가방 등이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그만의 패션이다. ‘대한민국 평균 패션’의 상징인 정형돈이 스스로를 ‘패션 종결자’라고 주장하며 패션에 관한 지식을 뽐내는 데서 그의 개그는 시작된다. ‘도전 달력모델’ 특집 때는 노홍철과 패션모델 장윤주를 향해 “보여주기 위한 가짜 패션”이라고 당당하게 소리쳤고, ‘파리지앵’ 패셔니스타인 정재형의 빈티지 티셔츠를 보고는 “주웠어요?”라고 물으며 능청스럽게 “개화동 헌 옷 수거함에 이런 옷 많다”고 놀렸다. ‘미존개오’는 이제 정형돈의 ‘신상’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한국방송 도 ‘패션’ 하면 빠질 수 없다. “쏘 핫, 쏘 쿨, 쏘 섹시, 쏘 인크레더블! 우리는 꽃미남 수사대!”를 외치는 코너 ‘꽃미남 수사대’는 패션에 ‘미친’ 경찰이라는 이야기로 매회 시청자를 웃긴다. 코너의 구성은 단순하다. 커다란 코르사주나 스카프, 화려한 색의 양복, 7부 바지 등을 입고 나와 서로의 의상에 대해 한바탕 수다를 떠는 경찰 둘(김대성·이광섭)이 사건 현장에서 용의자를 찾는다. 경찰은 ‘한 패션 하는’ 자신들보다 훨씬 더 옷을 잘 입고 멋진 용의자(류근지)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기는커녕 “와, 끝장난다!”를 외치느라 바쁘다.

이들을 질책하려고 나타난 경찰서장(김원효)의 의상은 경찰을 뛰어넘는다. 얼룩말 무늬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칭칭 감거나 깃털 목도리를 휘날리는 식이다. 그러고는 용의자의 신상 패션 아이템에 호들갑을 떤다. 이어 등장하는 경찰청장의 의상은 파격적이다 못해 격정적이다. 상체를 드러낸 가죽 멜빵바지나 미러볼로 만든 모자가 경찰청장의 스타일이다. 직급에 따라 패션이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시청자의 반응 역시 세진다.

어쩐지 속이 시원한 지적

과 ‘미존개오’ 정형돈, ‘꽃미남 수사대’는 모두가 열광하는 패션과 패셔니스타를 한 발 떨어져 바라보면서, 평범한 사람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그들만의 패션 세계를 개그로 치환한다. 은 ‘찐따’였던 우기명이 ‘패션왕’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통해 패션이 한 사람을 정의하기에 얼마나 하찮은지 보여준다. 정형돈의 ‘패션 지적’에는 어쩐지 속이 시원해지고, ‘꽃미남 수사대’를 보면 ‘신상’이나 ‘트렌드’라는 게 개그 소재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들 앞에서 패션은 날카로운 킬힐을 신어도 닿지 않을 높은 곳에서 깔창이 없는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이 느낌을 패션에 빗대자면 ‘비비드한 컬러에 재치 있는 장식을 단 스니커즈’라고 할까.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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