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에 가깝던 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또렷해졌다. “반값 등록금 실현하라.” “이명박은 사과하라.” 서울 중구 무교동길 방면에서 대형 펼침막을 든 대학생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서울 다동 맥줏집의 노천 테이블에 앉아 있던 김보경(36)씨는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단숨에 잔을 비우고 플라스틱 의자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박수를 쳤다. 소리를 질렀다. “으와~, 잘한다.” 옆 테이블의 남자 둘이 뜨악하게 쳐다봤지만 무시했다. 목소리와 손뼉의 강도를 오히려 높였다. 적당히 오른 취기가 전에 없던 용기를 북돋워준 덕이었다. “힘내라.” “잘한다.” 다른 테이블의 30대 직장인 몇몇이 호응하며 소리쳤다. 취객들의 돌발 응원에 학생 시위대도 힘을 냈다. “조건 없는 반값 등록금 즉각 실현하라.” “알바 땜에 연애도 못한다. 등록금 좀 내려라.” 무교동 골목의 데시벨 수치가 수직으로 치솟았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21세기 정보화 사회의 집회</font></font>“등록금 문제 심각하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거리가 열리고, 함께 웃고 떠들면서 연대감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김씨는 “뛰어오는 대학생들을 보는 순간 묘한 격정과 감동이 밀려왔다”며 “이런 자리를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모른다”고 했다. 도심의 ‘불법 시위’를 기다려온 사람은 김씨만이 아니었다. 지난 6월7일 저녁 서울 태평로 파이낸스센터 앞 촛불집회 현장에서 만난 불혹의 직장인 이아무개(40)씨도 그랬다. “답답했다. 뉴스를 볼 때마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맘껏 욕하고 거스르고 위반하면서, 그동안 쌓인 울화를 다스릴 기회가 절실했다.” 함께 나온 직장 동료 김아무개(37)씨는 즐기려고 나온 사람 같았다. 그는 조금이라도 집회 분위기가 늘어지면 “지루하다”고 불평하거나 “아직도 집회에 나와 꼰대짓 하는 사람 있다”며 혀를 찼다. 1시간 남짓 현장을 지키던 두 사람은 분위기가 ‘뜨지 않자’ 인근 맥줏집으로 향했다. 한 손엔 촛불을, 또 한 손엔 ‘이명박 정부 심판’이란 문구가 적힌 핑크빛 손팻말을 들고서.
문화평론가 진중권씨는 이런 집회 분위기를 두고 “전형적인 21세기 정보화 사회의 집회”라고 진단했다. 그가 보는 ‘21세기 집회’의 특징은 유희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태도 역시 다르다. 참가자의 상당수는 집회를 즐거운 놀이이자, 카타르시스(배설)의 기회로 받아들인다. 집회에 참여하는 것은 더 이상 고뇌에 찬 실존의 결단 행위가 아니다. 진씨는 2008년 촛불집회 때와 지금의 등록금 집회를 비교하며 “깃발이 더 많아지면서 전형적인 시위 형태에 더 가까워졌지만 ‘놀이’가 중심이 되는 것만은 변하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이런 집회의 모습은 지난 6월10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6·10 국민 촛불대회’에서도 나타났다. 과거 민중가요 노래패가 단골이던 문화제에는 ‘일단은 준석이들’ ‘좋아서 하는 밴드’ 같은 인디 밴드들이 나와 흥을 돋웠다. 집회 직전에는 탁현민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38)가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대학생·시민 등 1천여 명과 함께 윤도현밴드(YB)의 노래 를 배경으로 ‘립덥’(Lip-dup·노래 따라 부르며 연기하기)을 촬영하기도 했다.
‘놀면서 투쟁하기’의 진수는 대학 법인화에 반대하며 총장실과 행정관을 점거하고 농성 중인 서울대생들이 보여줬다. 사실 1980~90년대 대학 생활을 보낸 세대에게 총장실이나 대학본부 점거농성은 낯익은 풍경이다. 사무실 집기가 여기저기 쌓여 있고, 붉은 글씨 현수막이 어지럽게 걸린 벽면을 배경으로 머리띠를 두른 삭발 학생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구호를 외치던 풍경에선 왠지 모를 비장함과 무거움만 잔뜩 묻어났다. 이들에게서 1968년 미국 컬럼비아대학 학생들이 선글라스를 낀 채 총장 집무석에 앉아 총장이 애용하던 시가를 피워 물고 당국의 권위를 조롱하던 경쾌함(사진)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인간은 웃음으로 깨문다”</font></font>하지만 2011년 초여름 서울대생들의 농성에선 과거 그들의 선배들에게서 풍기던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은 없었다. 학생들은 농성 기간에 그룹 UV의 을 패러디한 뮤직비디오 ‘총장실 프리덤’을 제작해 유튜브에 올렸다. 학생 6명이 이틀 동안 농성장과 도서관 등에서 촬영한 뒤 노래방 녹음시설을 이용해 완성한 동영상은 삽시간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펌질’되며 법인화 반대투쟁에 대한 관심을 환기해나갔다. 제작진은 “노래패 활동을 하는 학생으로서 대학본부 점거 중에 뭔가 나름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뭘 할까 고민하다가 뮤직비디오를 만들게 됐다”고 했다.
이들의 뮤직비디오는 “인간은 웃음으로 깨문다”(샤를 보들레르)는 ‘웃음의 정치학’을 명쾌하게 실연해 보인 사례였다. “학우들은 점거 중, 총장님은 부재 중, 언론들은 왜곡 중” 같은 촌철살인의 개사가 원곡의 유쾌한 리듬과 결합해 전복과 풍자의 효과를 극대화했다는 찬사가 뒤따랐다. 동영상이 화제가 되자 점거농성의 배경이 된 ‘서울대 법인화’가 포털 검색어 순위 상위권에 오르기도 했다. 동영상이 빚어낸 경쾌한 웃음에는 ‘이빨’이 달려 있었다.
‘웃음에 물린’ 대학 당국은 쩌릿한 통증에 몸을 떨었다. 그들의 1차적 반응은 웃음을 비방하고 금지하는 것이었다. 서울대는 동영상 유포 사흘째인 지난 6월10일 NHN, 다음커뮤니케이션즈, SK커뮤니케이션즈 등 포털 3사에 ‘총장실 프리덤’ 동영상 관련 인터넷 주소(URL) 100여 개를 임시 차단해달라고 요청했다. 동영상이 “총장실 점거 등 불법행위를 조장하고, 총장을 비꼬는 노랫말로 학교와 총장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였다. 학생들은 “웃자고 만든 건데, 죽자고 덤빈다”며 실소했다. 역대 총장들의 기자회견을 마련하고 보수 신문의 칼럼을 동원해 학생들의 ‘반지성’을 점잖게 나무라던 대학 당국은, 순식간에 역전된 권력관계를 회복하려고 벌거벗은 힘의 논리를 전면에 내세워야 했다. 이 또한 웃음이 지닌 위력이었다.
웃음의 힘이 센 건 권위를 허물고 공포를 없애기 때문이다. 웃음은 자체로 불온하고 불경하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에는 웃음의 효능과 위력에 대한 두 수도사의 논쟁이 등장한다. 수도원에 웃음이 발붙일 여지를 없애려고 살인마저 서슴지 않는 호르헤 신부는 웃음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간파하고 있다. “웃음은 사악한 인간을 악마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시킨다. 웃는 순간 사악한 인간에게는 죽음이 문제가 아니된다. 우리 죄 많은 인생이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선견자가 되고, 천상적 은혜의 총아가 되어 어쩌자는 것인가.” 나아가 웃음은 사자의 이빨처럼 상대방을 깨문다. 서울대생들의 뮤직비디오처럼.
<font size="3"><font color="#006699">모든 싸움엔 놀이가 담겨 있다</font></font>이런 웃음이 권력에 맞선 집합 행동에 녹아들 때 투쟁은 놀이가 된다. ‘웃으며 싸우기’ ‘놀면서 투쟁하기’는 물론 2008년 촛불시위의 학습 효과다. 당시 시민들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철회를 요구하며 서울 광화문 등에서 벌인 2박3일 릴레이 시위에 ‘72시간 국민 MT’라는 이름을 붙였다. 퇴근한 시민들이 야유회 가듯 몰려나와 시위를 즐겼다. 경찰과 대치 중인 최전선에선 여전히 밧줄과 소화기가 동원된 힘겨루기가 벌어졌지만, 불과 50m 뒤 아스팔트 위에선 캔맥주와 막걸리잔이 오가고, 기타·아코디언·트럼펫을 들고 나온 시민악대의 즉석 공연이 펼쳐졌다(대치선의 시민들에겐 경찰버스 바퀴에 밧줄을 걸어 당기는 것도 흥겨운 놀이였다).
엄숙함과 비장함이 지배해온 한국의 시위 문화에선 낯선 현상이었지만, 기실 투쟁이 놀이와 결합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인간과 동물의 모든 싸움에는 놀이적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를 쓴 하위징아는 말했다. “놀이는 문화보다 오래된 것이다. 모든 형태의 문화는 그 기원에서 놀이 요소가 발견되며, 인간의 공동생활 자체가 놀이 형식을 갖는다. 사냥은 물론 전쟁조차 놀이의 성격이 있다.” 그러니 3년 전 여름밤의 쾌감을 못 잊어 도심에 난입할 기회만 호시탐탐 노려온 ‘날라리’ 불온세력은 자신의 경박과 방종을 탓할 게 아니라, 자신 있고 당당하게 외칠 일이다. “재미없는 투쟁은 고행이다. 모든 시위에 음주와 가무와 ××와 ○○을 허하라.” 2011년 여름,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호모루덴스 레지스탕스’의 탄생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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