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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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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 작은 불빛 깜박이는 그곳”

1953년 마스터플랜 이후 평양의 발전과 오늘의 퇴락, 내일의 변화를 분석한 임동우의 <평양, 그리고 평양 이후>
등록 2011-06-03 15:09 수정 2020-05-03 04:26

도시 서울의 직장인은 아침마다 전쟁을 치른다. 흡사 피난 열차에 매달리듯 사람들은 지하철을 향해 돌진한다. 몸을 구겨넣는다. 때때로 공중 부양의 경험도 한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두 발을 허공에서 허우적대는. 매일이 여행인 사람도 있다. 시의 외곽 혹은 바깥에서 눈뜬 노동자는 도심 한가운데의 일터를 향해 긴긴 버스 여행을 떠난다. 모두들, 직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몸과 정신이 노곤해진 상태로 저녁 술자리에서 하던 푸념을 아침부터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왜 이러고 살아야 하지?’

생산·녹지·상징의 도시

임동우의 <평양, 그리고 평양 이후>

임동우의 <평양, 그리고 평양 이후>

그런데 이런 도시가 있다면? 주거 공간과 생산 공간이 멀지 않은 도시, 주거 영역에 차별이 없으며 대중교통을 포함한 공공서비스 모두가 동일한 질과 이용성·접근성을 가지며 통근을 위한 시간과 노력이 최소화되는 도시, 높은 수준의 편의시설에 동등한 접근성을 가지며 풍성한 녹지 공간으로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도시.

실존하지 않을 것 같은 이런 도시는 사실 우리 가까이에 있었다. 북한의 수도, 평양이다. (효형출판 펴냄)에서 건축가 임동우는 사회주의 도시계획에 따라 건설된 평양이 한때 공산권 국가로부터 ‘이상적 사회주의 도시’라고 인정받았단 사실을 밝혔다. 지금도 평양 방문자들은 대규모 광장과 건축물, 주거와 생산시설, 녹지의 조화로운 배치가 일궈내는 평양의 풍경을 보고 놀란다고 한다. 가난과 기아에 허덕일 줄 알았던 도시가 생각 이상으로 반듯하게 정비돼 있기 때문이다.

평양은 어떻게 건설된 도시일까. 한국전쟁 당시 도시 기반을 모두 잃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평양은(당시 평양 인구가 30만 명 정도였는데, 미국이 평양에 떨어뜨린 미사일 수가 약 35만 기였다고 한다) 백지 상태에서 도시 재건을 시작했다. 북한 정부는 그곳에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해보고 싶었다. 재건 초기에는 헝가리와 불가리아로부터 원조를 받아 이들 국가로부터 영향받은 건축 양식도 보이기도 했지만 1953년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모스크바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돌아온 건축가 김정희의 주도로 도시 개발이 시작됐다.

북한은 평양을 다핵화한 공간으로 건설했다. 공간을 250×250m의 소규모 격자로 나눠 그 안에서 생산과 소비, 휴식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웃 동네와 우리 동네 사이의 격차에 한숨짓는 일이 없도록, 같은 크기의 격자들은 같은 수준의 위계를 가졌다.

평양이 지향했던 사회주의 도시는 이외에도 공간적 특징을 가지는데, 크게 △생산의 도시 △녹지의 도시 △상징의 도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생산의 도시는 앞서 언급한 대로, 다른 지역과의 격차를 없애는 것이 목표다. 도시를 소규모 격자로 구획한 것보다 좀더 큰 틀로 바라보고 도농 간, 도시와 산업지구의 격차를 해소하려 한다. 농촌과 공업 지역이 도시에 생산품을 대는 종속적 공간이 되는 것과 도시가 소비만 하는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것을 방지하는 일을 목표로 한다.

평양은 생산·녹지·상징의 공간으로 계획된 도시다. 오른쪽에 상징의 구조물인 주체사상탑이 보인다. 연합

평양은 생산·녹지·상징의 공간으로 계획된 도시다. 오른쪽에 상징의 구조물인 주체사상탑이 보인다. 연합

드넓고 삭막한 광장에 꼿꼿이 허리를 세운 군사들의 모습만으로 평양 풍경을 단정했던 방문자들은 넓은 녹지 공간과 공원에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지만, 녹지 공간의 구성 또한 사회주의 도시 계획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평양의 거주인 1인당 녹지 면적은 2002년 당시 58㎡에 달했다. 평양은 외곽의 녹지를 도시로 끌어들여 도시 팽창을 억제하고, 도시와 농촌 간 공간적 연결을 도모했다.

마지막으로, 상징의 도시는 평양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여러 개의 위성 지역에 소규모 광장을 배치하고 평양의 중심부에 김일성광장을 건설했다. 상징의 도시는 사회주의 도시계획 초기 이론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효율적인 대중 선동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조성했다. 이는 뒤에 사회주의 도시 계획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사업으로 자리잡으면서, 자본주의 도시와 사회주의 도시의 가장 큰 차이를 낳는 요소로 작용했다.

사회주의와 시장경제 결합한 새로운 도시

북한은 평양을 이상적 사회주의 도시의 표본으로 꾸려가려 했지만, 이상이 현실에서 지속되지는 못했다. 동구 공산권이 붕괴하자 외부적으로 치명적 타격을 입고, 정치·경제적으로 입지가 좁아지고 연이어 대규모 자연재해까지 당해 초기의 마스터플랜을 꾸준히 실행할 수 없었다. 먹고살기도 힘든 형편에 도시를 가꿀 여력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또한 현재 정치적으로 권력 이양 과정에 있고, 2002년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를 필두로 새로운 경제 시스템이 도입되며 평양은 어떤 식으로든 간에 변화를 겪을 것이다.

지은이는 평양의 세 가지 공간적 특징이 앞으로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 말한다. 생산·녹지·상징의 공간이 가진 특징이 향후 새로운 도시화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느냐에 따라 평양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변화가 되든 간에 현재 평양에 남은 독특하고 단단한 뼈대 위에는 기존 사회주의 도시나 자본주의 도시에서는 볼 수 없던 돌연변이식 도시 조직이 얹힐 것이라고 말한다.

2003년 크리스 슈프링거는 에서 평양 방문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둠 속 작은 불빛 몇 개만 깜박이는 이곳은 평양이다. 평양은 수도임에도 외부인에게 아주 일부만 개방되는 드문 도시 중 하나다. 직접 방문을 해보아도 평양은 기대감에 대한 묘사나 쉬운 분석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 첫 퍼즐은 대규모 공공건물과 기념물로 이루어진 웅장한 도시 경관에서 발견된다. 경제난에도 도시의 기반 시설은 현대적이고, 다른 무엇보다도 잘 정비돼 있었다.”

평양에 대해 제한적 정보만 제공받은 우리는 이 가깝고도 먼 도시에 대해 그동안 얼마나 무지했던가. 한때 이상을 꿈꾸며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을 반짝이던 도시는 이제 변화의 기로에 놓여 있다. 북한이 어떤 노선을 선택하느냐에 모습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은이의 해석에 따른다면 어쨌든, 우리는 앞으로 세상에서 가장 새로운 형태의 도시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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