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인기라는 ‘계급’ 넘은 판타지

뜨거운 바람 몰고온 연예인이 연애하는 드라마 <최고의 사랑>… 그들에게서 우리의 모습 발견하는 공감이 인기 비결
등록 2011-06-03 15:00 수정 2020-05-03 04:26
* 연예가 쑥덕쑥덕

30대 후반인 최고의 한류스타 A와 아이돌 그룹 출신 방송인 B의 열애설이 방송가에서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연인인 톱여배우 C와 결별 발표만을 남겨놓고 있는 A는 발표 전에 B와의 관계가 주목을 받자 난감한 상황이라고. 여기에 B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하고 있는 일반인 D도 얽히며 이들의 관계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는 전언. 평소 도도한 이미지로 여러 편의 광고를 찍어온 C는 자신의 이미지에 해가 갈까 우려하고 있다고 한다. D는 ‘완벽남’이라고도 불릴 만큼 대단한 외모와 능력의 소유자다. 꼬일 대로 꼬인 이들의 관계에 관한 소문에 A와 B의 소속사는 “절대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A의 매니저가 오히려 B와의 열애를 돕고 있다고 전했다.

에서 까지

드라마 <최고의 사랑>. 문화방송 제공

드라마 <최고의 사랑>. 문화방송 제공

스포츠신문 연예면에서 한두 번쯤은 봤을 법한 알파벳 기사다. 이런 식의 가십 기사는 알파벳에서 끝나면 뜬소문으로 종결되지만, 실제 알파벳이 실명으로 밝혀지면 ‘스캔들’이 된다. 그런데 이 내용이 신문 기사가 아닌 드라마 속으로 들어오면 ‘스캔들’이 아닌 로맨틱 코미디가 된다. 방영됐거나 방영 중인 드라마 속 인물들을 넣어 알파벳을 풀어보자.

30대 후반의 한류스타 A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는 ‘스캔들 메이커’ 오스카. 오스카와 연인이 될 만한 톱여배우 C로는 ‘국민 요정’ 오승아가 있다. 독고진도 A가 되기에 충분하다. A가 독고진이라면 B는 ‘국보소녀’ 출신으로 현재 같은 소속사인 구애정이 딱이다. 그렇다면 C는 구애정과 같은 그룹에 있던 강세리. 30대 후반은 아니지만 신(新)한류스타인 아이돌 그룹 ‘에이엔젤’의 황태경, 고미남(고미녀)과 ‘국민 여동생’ 유헤이도 삼각관계의 전력이 있다. 그렇다면 ‘완벽남’이라는 일반인 D는 누구일까? 로엘백화점 김주원 사장이나 윤필주 한의사라면 D가 되기에 충분하겠다.

문화방송 수목드라마 은 ‘연예인들이 연애하는 드라마’다. 한류스타 독고진(차승원)과 2000년대 초반 인기를 모으다 해체된 걸그룹 ‘국보소녀’ 출신 구애정(공효진)이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의 이 드라마가 SBS 이후 별다른 화제작이 없던 드라마계에 오랜만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차승원과 공효진의 연기력과 살아 있는 캐릭터, 귀를 잡아끄는 대사 등이 이 드라마가 사랑받는 이유다. 이 드라마가 연예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인기 요인이다.

연예계를 소재로 한 드라마는 최근 몇 년 동안 자주 방영됐다. 단편적으로만 보여지던 연예계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드라마는 2008년 방영된 다. 김은숙 작가가 쓴 이 드라마는 드라마 제작을 둘러싼 과정을 현실적으로 묘사해 눈길을 끌었다. 연예인이 발탁돼 스타로 키워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성상납이나 계약 등의 문제부터 작가와 방송사 간 힘겨루기 등의 갈등을 놓고 그 사이에 연예인과 매니저, 작가와 PD 등 등장인물들 간의 사랑이라는 로맨스를 넣었다. 드라마에 전도연 등 실명을 가진 배우들이 카메오로 등장하며 속 세계는 현실과 접점을 찾아냈다.

에 이어 같은 해 방영된 한국방송 드라마 (이하 ) 역시 방송사 드라마 제작국이 배경이다. 이 드라마는 연예인보다 드라마를 만드는 PD 등 제작진에 더 초점을 맞췄다. 배종옥·윤여정 등을 통해 중견 연기자들의 삶을 보여주며 연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수십 년을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그려낸 것도 이 드라마가 보여준 현실의 조각이다. TV평론가 김선영씨는 “와 는 화려해 보이기만 하는 연예계와 방송계를 하나의 직장이자 직업군으로 그려냈다”며 “그들이 평범하게 사랑하고 연애하는 이야기로 소재와 내용 면에서 차별화를 이뤄냈다”고 평했다.

한 발짝 더 현실로 들어온 드라마

연예인들 중 가장 많은 팬덤을 지닌 아이돌 그룹이나 가수를 등장시켜 연예계의 이야기를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환상적인 이야기로 그려낸 트렌디 드라마도 있다. 을 쓰고 있는 홍정은·홍미란(이하 홍자매) 작가가 2009년에 내놓은 가 그렇다. 남자들로 이뤄진 아이돌 그룹에 남장을 한 여자가 멤버로 들어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멤버들과 사랑에 빠진다는 지극히 환상적인 이 드라마는 수많은 여성팬들의 팬심을 자극했다. 드라마 속 아이돌 그룹인 ‘에이엔젤’이 드라마에서 부른 곡이 실제 음원으로 발표되며 이 드라마는 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현실에 진입했다. 지난 2월 종영한 한국방송 도 연예인을 길러내는 고등학교라는 설정으로 연예인 지망생들이 연예인이 되는 과정을 성장 드라마로 그려냈다.

은 지금까지 연예계를 다룬 드라마에서 한 발짝 더 현실로 들어온다. 한때는 최고의 인기를 얻은 걸그룹 멤버였지만 멤버 간 폭행과 불화 등으로 팀이 해체된 다음 간신히 버텨온 구애정은 포털 사이트 연예뉴스에서 봐온 수많은 연예인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갖고 있다. 집안 경제를 책임져야 하기에 행사나 업소뿐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의 굴욕적인 역할도 모두 해내는 구애정은 ‘비호감 연예인’이자 ‘생계형 연예인’이다. 구애정은 조카가 놀림을 당할까봐 “친구들에게 고모가 구애정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조카 입단속을 시키고 자신과 ‘급이 다른’ 톱스타와의 열애가 오히려 독이 될 것을 알고 주저한다. 드라마는 화려하기는커녕 굴욕적이기까지 한 연예인의 모습을 코믹하고도 씁쓸하게 그려낸다.

구애정과 독고진이 얽히는 계기도 의상 협찬이나 프로그램 고정 출연, 인기에 따른 서열 문화, 스캔들 등 현실에서 매일 보는 연예 뉴스 속 이야기다. 홍자매 작가는 이렇듯 연예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알아챌 법한 현실과의 연동 장치를 드라마에 무수히 깔아놓는다. 이런 장치를 통해 독고진과 구애정, 또 둘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의 캐릭터는 시청자에게 설득력을 얻어낸다. 김선영씨는 “연예계 뉴스가 대중의 일상으로 들어온 요즘 연예계는 어떤 직업군보다 대중에게 친숙한 분야가 됐다”며 “그들에게서 우리와 닮은 모습을 찾아내고 그들의 이야기를 공감의 코드로 풀어내는 것이 이 주목받는 이유”라고 말했다.

물론 도 판타지다. 현실에서는 최고의 A급 톱스타가 예능 프로그램에 간신히 고정 출연 정도 하는 B급 연예인과 결혼을 발표하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장동건은 고소영과 결혼하고, 서태지와 결혼했던 이지아는 정우성과 연애를 한다. 그럼에도 시청자가 을 보며 가슴 떨려하는 것은 왕자님이 신분의 벽을 극복하고 평범한 여인과 사랑에 빠질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처럼 이 드라마가 21세기에 신분만큼이나 중요한 ‘인기라는 계급’을 뛰어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