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엔 존박이 우승할 거란 건 알고 있지?” 에서 이하늘이 김지수와 허각을 앉혀놓고 말했다. “우리 팀은 점점 공포의 외인구단이 되어가는구나” 에서 김태원이 한탄했다. 이때 승부는 정해졌다. 이 말은 평범한 오디션 응시자들에게 희망의 복음이었다. 가창력 경연이니 뭐니 해도 결국엔 스펙이 되는 사람들이 선택받을 거라고 공언하는 순간 시청자는 외모도 팬 군단도 부족한 사람들에게 투표하려 전화기를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5월20일 열린 준결승전은 백청강, 이태권, 셰인 3인의 대결이 됐다. 존박 없는 ‘허각들의 대결’이다.
영국의 수전 보일, 한국의 백청강지금 오디션은 드라마 이상의 드라마다. 오디션을 위한 동화가 있다. 2009년 1월21일 영국 글래스고의 스코틀랜드 컨퍼런스 센터 무대에 험상궂은 얼굴의 48살 여성이 오른다. 영국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 오디션이다. 여태껏 키스 한 번 못해봤다는 이 여성, (I Dreamed A Dream) 도전곡조차 놀림받는 시골 교회 성가대원이다. 그런데 그가 노래를 시작하고 몇 초 뒤 ‘수전 보일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일이 일어났다. 방청객의 놀란 환성과 박수 소리가 커졌다. 심사위원 어맨다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흘렸다. 수전 보일은 그해 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수전 보일의 공식 홈페이지는 유튜브 동영상 조회 수 5억 건, 전세계 900만 장 이상의 앨범 판매, 전세계 21개국 음반차트 1위 기록 등 이 오디션 신데렐라의 행복한 후일담을 전한다.
그 꿈의 동화는 한국에서도 다시 쓰일까. 도전자 백청강(22)은 중국에서 열린 예선전에 참가하러 옌지에서 칭다오까지 36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왔다. 옷차림도, 1980년대 만화 주인공 ‘까치’를 닮은 머리 모양도, 무대 매너도 그가 생계를 위해 일하던 밤무대의 흔적을 미처 떨치지 못한 채였다. 그런데 그가 노래를 부른 뒤 모두의 시선이 바뀌었다. 심사위원인 가수 이은미는 “가장 쉽게 노래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말했다. 그의 별명은 ‘(중국에서 찾은) 원석 백청강’이 됐다. 상업 무대였으면 자칫 치명적일 수도 있었을 옛 청년 이미지는 오디션 무대에서 되려 순수한 이미지라는 자산이 됐다. 167cm의 작은 키와 옌볜 사투리조차 그가 꼭대기까지 날아오르는 데 짐이 되지 않았다.
이태권(19)은 또 어떤가. 우락부락한 외모 탓에 1차 예선에서 그를 처음 본 심사위원들은 “싸움 잘할 것같이 생겼다” “눈썹은 일부러 민 거냐”며 모처럼 긴장을 풀고 웃었다. 그런데 그가 기타를 치며 (What’s up)을 부르기 시작하자 모두 돌연 정색했다. 심사를 맡은 김태원과 방시혁은 분명 흥분했다. 방시혁은 “내 취향의 노래도 아닌데 이상하게 가슴을 울린다”고 고백했다. 김태원은 그 자리에서 “인연이 된다면 내가 당신을 가르치고 싶다”고 제안했다.
유튜브 동영상 오디션을 통해 합격한 캐나다인 셰인(21)은 어릴 적 안암을 앓아 왼쪽 눈이 의안인 시력장애인이지만 장애를 딛고 준결승전에 올랐다. 도전이 계속되며 165cm의 작은 체구, 언어장벽, 시력장애 등 핸디캡은 가려지고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소화하고 편곡과 합주가 능란한 음악인의 모습이 부각됐다. 셰인은 오디션에 합격하자마자 다니던 캐나다 험버대를 휴학하고 한국으로 날아왔다. 한국어를 전혀 못해 뜻도 모르는 가사를 매번 그냥 외워 완벽한 한국인 발음으로 소화하는 열정과 음악적 센스엔 시청자들도 혀를 내두른다. 셰인은 5월13일 톱4 공연에선 김태원한테서 심사위원 최고점을 받았다.
오디션은 가수 지망생이 주연하고 시청자가 연출하는 드라마다. 오디션 시청자는 스타 시스템에 들어가지 못하는 약자들을 사랑한다. 문화방송이 공개한 4월12일 방송 대국민 문자투표 결과를 보면, 170만 명이 문자투표에 참여해 백청강에게 가장 많은 표를 줬다. 그 뒤를 손진영, 셰인, 이태권 등이 이었다. 이 4명이 나중에 고스란히 준준결승전인 ‘톱4’에 진출한다. 그런데 이날은 이 첫 문자투표를 실시한 날이기도 했다. 이때 열린 ‘톱12 경연’에서 황지환과 권리세가 탈락했다. 권리세는 심사위원 점수에서 6위를, 황지환은 공동 10위를 차지했다. 문자투표가 이들의 탈락을 결정한 셈이다. 권리세는 미스재팬 출신이라는 외모와 춤실력 덕분에 남자 참가자들에겐 동경, 여자 참가자들에겐 경계 대상이었다. 예선 내내 카메라가 쫓아다녔던 관심의 대상이기도 했다. 예선에서 탈락하고 패자부활전으로 돌아오자 이 프로그램이 가창력 대신 스타성만 보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잇따랐다. 팬만큼이나 안티도 많은 권리세를 시청자가 별렀던 셈이다. 하필 권리세가 탈락한 날은 그가 그룹 자우림의 를 개성 있게 소화해 지금까지 공연 중 최고의 노래 실력을 선보인 날이었다. 손진영은 5번의 생방송 경연 중 네 차례나 심사위원 최저점을 받았지만 시청자 문자투표에 힘입어 톱4에 올랐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보컬 트레이너는 “이쯤 되면 시청자에게 가창력으로 공정하게 평가받는다는 생각이 판타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강명석 편집장은 “오디션을 보는 시청자는 사회적으로 불리한 마이너리티들의 성공 신화를 기대한다. 시청자가 동정표를 행사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환경은 어렵지만 잘난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쏠리는 현상이 있다”고 말한다. 서울 강남3구 출신 학생들이 서울대 신입생의 40%를 차지하는 사회에서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빛바랜 신화에 가깝다. 취업은 더욱 좁은 문이다. 대학생은 스펙 경쟁이라도 한다지만, 청년실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비대졸자에겐 선택의 여지도 별로 없다. 사회에 정착하는 것만이 절대다수의 꿈이다. 중국 지린성에서 자라서 한국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양진(25)씨는 “한국에 온 뒤 다른 조선족과 거리를 두고 살았지만 ‘중국 사람들 예술하려 해도 우리 소수민족 인정하지 않습니다’라던 한 출연자의 말에 공감해 꼬박꼬박 문자투표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음악평론가 차우진씨는 “으로 데뷔한 서인국씨를 보면 일단 가수가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의 가정형편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스펙이 부족한 사람들이 진입장벽을 뚫는 과정을 지켜볼 때만 자신의 일인 것처럼 감정이입을 한다는 것이다.
착해지면 리얼리티 잃는 아이러니오디션은 또한 냉혹한 드라마다.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그렇듯 에도 별처럼 많은 참가자의 사연이 반짝였다. 유튜브 동영상 조회 수 17만 건을 올린 참가자 대니얼 김은 화장실에서 연습하며 눈길을 끌었다. 열정이라면 둘째가기 서러운 듯 보였지만 탈락했다. 미국에서 서바이벌 오디션 결승전까지 진출했던 미국인 음악 프로듀서 내털리 화이트도, 한때 드라마 배경음악을 부른 가수였지만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며 활동을 못하다 어렵게 오디션 문을 두드렸던 한 참가자도 예선 문턱에서 돌아서야 했다.
올해 8월 본선 ‘슈퍼위크’를 치를 예정인 오디션 지원자는 지금까지 모두 166만9958명. 지난해의 134만 명을 이미 넘어섰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김용범 팀장은 “가족과 함께 와서 축제처럼 참여하는 사람도 있지만,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부르는 절실한 사람도 많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넘쳐나도 “재능을 펼쳐 보이고 싶지만 도저히 아이돌 프레임에 들어갈 수 없는 청춘들로” 프로그램은 붐빈다.
공정함을 생명으로 하는 오디션에서 각본이나 조작 따윈 있을 수 없지만, 연출자의 의도는 분명히 있다. 전 음악방송 PD이자 지금은 큐티브이 제작기획을 맡은 이문혁 팀장은 “지난 결승전 주제는 조용수 작곡가의 신곡이었다. 존박은 한국 노래를 허각만큼 잘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재능과 스타성을 지닌 가수였다. 만약 둘의 가창력을 정말 공정하게 가리려고 했다면 불공정한 주제였다. 연출자가 드라마를 원하는지, 스타 배출을 원하는지에 따라 오디션 무대는 달라지고, 승부도 좌우할 수 있다”고 했다. 김용범 팀장은 “올해는 논란을 막으려고 심사위원과 채점제도를 막판까지 손볼 것”이며 “발라드뿐만 아니라 리듬앤드블루스(R&B), 힙합, 밴드 등 다양한 장르와 형식을 동등하게 경쟁시킬 것”이라고 했다.
이 논란을 줄이려고 택한 해법은 시청자 투표에 점수의 70%를 할애하는 것이었다. 과제곡도 대중적인 발라드곡 위주로 해왔다. 그야말로 시청자 참여 폭과 권한을 넓힌 셈이다. 그런데 시청자가 생사권을 쥐자 프로그램 시청률은 오히려 떨어져왔다. 5월13일 시청률은 전국 기준 20.2%(AGB닐슨)로 전주보다 1.1%포인트 떨어졌다. 4월8일 첫 생방송에서 자체 최고 시청률 22.8%를 기록했을 뿐 최종 결선 무대가 다가오는데 시청률은 내내 하락세다. 무대 연출과 퍼포먼스등 여러 분석이 나오지만, 무엇보다 심사위원들이 권위를 잃고 관전평만 하는 위치로 추락하며 긴장감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시청자는 자신이 지지하는 가수에 대해 긍정적인 평을 원하지만 그 순간 리얼리티를 잃게 된다는 역설에 직면한다. 현실에선 부정적인 멘토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끝까지 두드려라, 잔혹한 주문지금 오디션은 가장 사회적인 드라마다. 오디션 프로그램 의 사이먼 코웰, Mnet 이승철, 의 방시혁·이은미 등 혹평으로 악명 높은 심사위원들은 사회의 좁은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네 나쁜 점을 고치지 않으면 탈락할 것”이라고 몰아세우는 면접담당관 같은 캐릭터다. 생산성을 높이라고 몰아세우는 사회 선배일 수도, 팀장일 수도, 회사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어떤 멘토는 “떨어지더라도 그대들의 인생에 오점이 아닌 시작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고, 다른 멘토는 “꺽꺽대고 우는 소리 좀 빼고 할 수 없냐”고 화를 냈다. 그러나 늘상 화를 내는 멘토라고 하더라도 정말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면접담당관이 그렇듯이, 회사의 상하관계에서 그렇듯이 말이다.
본선에서 탈락한 존박은 한 인터뷰에서 “사이먼 코웰이 방송에서는 ‘너는 곧 전에 있던 밴드로나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식으로 독설을 퍼부었지만 나중에 찾아와서는 ‘재능이 보인다. 앞으로 잘될 것’이라고 격려했다”고 전했다. ‘톱20’에 들었다가 탈락한 참가자 이진선씨는 “오디션에 참가했던 한 달가량 멘토들이 틈날 때마다 찾아와 연습시키며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며 고마움을 드러냈다. 멘토인 이은미씨가 “‘너는 악기는 좋은데 쓸 줄을 모른다’는 말을 여러 번 했을 때 처음에는 좌절했지만 나중에는 가장 아끼는 충고가 되었다”고도 했다. 여주대 실용음악과를 다니는 이진선씨는 올 여름방학 때 본격적으로 기획사 오디션에 응시할 계획이라고 했다. 에 출연했던 김보경씨는 그의 1년 선배로 올 초 미니 음반을 내고 가수 활동에 들어갔다. 이진선씨는 방송에서 가창력을 인정받았지만 기획사와 계약하지 않는다면 오디션을 거치며 모든 과정을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곳에도 “모든 가수가 풍부한 성량으로 노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멘토도 있을 것이다. 또 “부족한 성량을 해결하기 전까지 가수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는 멘토도 있을 것이다. 어느 멘토의, 선배의 말이 답일까. 아마도 “두드려보십시오, 열릴 것입니다. 열리지 않더라도 계속 두드리십시오”라는 대책 없는 이 사회의 주문이 답일 것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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