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영화다. 문화방송 와 뮤지컬 흥행에 이어 두 편의 영화가 나란히 1980년대를 호출한다. 영화 와 는 시계를 30여 년 전으로 되돌린다.
친구 찾는 40대
“젊은이는 자극에 민감하고, 중년은 공감하는 대상에 마음을 연다.” 에세이 는 말한다. 이때 마음을 연다는 말은 지갑을 연다는 말과 동의어다. 지난 3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초연한 뮤지컬 는 지금까지 7만 명이 봤다. 그중 31~50살 관객이 절반 가까운 비율을 차지해 3만 명을 넘었다. 2007년 공연을 시작한 도 2009년부터 관객 수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2009년 한 해 8만 명을 넘겼으며 올해는 한 달이 못 돼 2만 명을 넘어섰다. 초연 때는 6.5%이던 40대 관객 비율이 올해는 13%를 넘는다. 가 40~50대에게 익숙한 문화적 코드로 꾸며졌다면, 은 TV 을 곁다리로 보고 만화 를 끼고 살았던 40대 전후 세대를 위한 잔치다. 지난 5월4일 개봉한 영화 는 일주일 만에 관객 100만 명을 넘겼다. 많은 관객이 만화 와 스펙스(‘프로 스펙스’의 짝퉁) 신발, 잡지 에 지갑을 연 셈이지만, 그들이 정말 보고 싶었던 게 그것이었을까.
영화 는 암으로 죽어가는 친구 하춘화를 위해 임나미가 예전 칠공주 멤버 5명을 찾아나선다는 설정이다. 그들이 과거 여행에서 만난 것은 시들어가는 40대의 현실이다. 쌍꺼풀에 매달렸던 친구는 지금은 보험 실적에 목을 매고, 미스코리아가 될 거라던 친구는 술집 구석에서 시들고 있다. 욕쟁이 친구는 가식덩어리 중산층 삶의 노예가 됐단다. 상처 입고 자살을 기도했던 친구는 아예 꽁꽁 숨어버렸다. 깜찍했던 내 친구가 왜 시어머니한테 욕 들으며 시집살이를 견뎌야 하나. 현재가 남루한 만큼 알록달록 티셔츠에 (스키니진이 아니라) 백바지를 찔러 입은 과거는 한층 더 눈부셨다고 그들은 기억한다. 닭벼슬 머리는 촌스러운 패션의 상징이 아니라 꼿꼿하고 당당하던 그 시절의 상징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고립이다. 홀로 울화를 쌓으며 늙어가는 시간이다. 오랜만에 뭉친 친구들은 친구 딸을 괴롭히는 시건방진 고등학생들을 실컷 때려주고 서로 위로하고 얼러주며 25년 세월을 껑충 뛰어넘는다. 불우한 친구들이 팔자를 고치는 판타지 속에서도 짝사랑하던 준호 오빠에겐 결국 한마디 말도 못 건네지 않는가. 결국 40대 여자들의 가장 큰 욕망은 자기 편을 만드는 것일지 모른다.
25년 전 자신을 향한 말걸기와 는 둘 다 지금 40대가 돼버린 이들의 소년·소녀 시절을 그리지만 둘의 시대 초상화는 사뭇 다르다. 6월2일 개봉하는 노홍진 감독의 영화 는 누추한 골목길로 숨어든다. 는 지옥 같은 1980년대를 살아넘긴 25년 전 어느 가족의 이야기다. 거기서 난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달랑 1만원에 팔아넘긴 애완견 밍키가 있고, 기타도 잘 치고 입바른 소리도 곧잘 했는데 실종자가 돼버린 뒷방 누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있었다. 엄마를 사랑한다면서도 툭하면 밥상을 뒤엎고, “그깟 돈 필요 없다”더니 딸의 돼지저금통을 털어가는 아버지. 오기와 현실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 아버지. 군사독재 정권을 유지하던 반공 이데올로기, 민주정의당이라는 국가권력과 자신을 동일시하던 성삼위일체 우리의 아버지. 그러나 실은 아버지가 집을 나가도 아무도 아버지를 그리워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어차피 만년 백수인 아버지의 부재는 가족에게 사고가 아니라 자유다. 주인공 소년인 준석은 아버지의 빛나는 정치적 유산인 민정당 당원증도 피식 웃으며 태워버린다. 386세대는 부모 세대에 대한 실질적 반란을 처음 시도한 세대이기도 하다. 는 지금은 40대가 돼버린 사람들의 어두운 사춘기에 보내는 헌사이자 그 사춘기를 수호하던 허깨비들에 대한 회상록이다.
결단코 돌아가고 싶지 않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40대들의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 영화가 그리워하는 것은 무너져 가는 가부장제에 대한 그리움도, 곳곳에 괴물처럼 도사린 폭력도 아니리라. 백골단한테가 아니라면 야구방망이로 아이들 때리기를 즐기는 신문배급소 사장한테라도 덤벼라. 다음엔 권력자 아들한테 복수할 날이 오리니. 영화 는 사회 부조리와 개인의 자아가 충돌하는 폭풍 같은 순간을 담아낸 성장 스케치다. 그때 피우지 못했던 꽃, 지금 피우면 되잖아. 인생의 늦봄을 향한 말걸기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그렇게 흘려보낸 사람들을 스크린으로, 음악으로 만나는 시간은 그때의 사람들과 대화하는 순간이다. 추억은 멜로디의 옷을 입고 온다.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등이 향수를 자극하는 노래들을 기타 멜로디에 실어 보냈던 문화방송 는 40대 여성 12.8%, 40대 남성 6.8%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여자 40~50대 시청자가 이 프로그램의 40% 넘는 비율을 차지하기도 했다(AGB닐슨미디어리서치 조사). 영화 는 ‘타임 애프터 타임’의 신디 로퍼가, ‘터치 바이 터치’의 조이가 지배하는 세계다. 사랑조차도 리처드 샌더슨의 노래 ‘리얼리티’를 따라 흐른다. 영화 에서 알렉상드르 스털링이 소피 마르소에게 헤드폰을 씌워주던 그 순간 말이다. 고 이영훈 작가의 음악에만 기댄 뮤지컬 가 가능했던 것도 복고 음악의 부흥 덕분이다. 김완선도 재기를 준비하고 변진섭도 구창모도 다시 방송에 얼굴을 내민다. 선데이, 김지우, 김산호 등 젊은 가수와 배우들조차도 무대에 올라 이승철의 , 나미의 , 이문세의 , 현진영의 를 부르고 토끼춤이나 권총춤을 추는 상황이다.
부모 처지에서야 아이들과 함께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을 기회이지만 아이들은 어떨까? 우리는 지금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생산해내지 못하고 과거에만 매달리는 가요계 성장 지체 현상을 목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88만원 세대는 일자리도 모자라 문화적 아이콘까지 40대에게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음악평론가 조일동씨는 “음반을 구입하고 콘서트를 봐야 할 20~30대의 지갑이 열리지 않는다는 측면에선 퇴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세대의 음악 취향은 전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40대는 슈퍼스타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지만 20~30대에게 시대의 아이콘 같은 건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를 찾아 탐닉하는 소수 장르에 대한 취향이 있을 뿐”이라고 분석한다. 지금 40대는 엄혹한 시절 속 잃어버린 사춘기를 찾아나섰다. 앞으로 10년 뒤 지금의 20~30대는 잃어버린 문화적 연대의 시대를 찾아나서지 않을까.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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