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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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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와 객체를 뒤흔들다

인권위가 제작한 인권영화 <시선 너머>… 배타주의 넘어 나와 남을 다르게 여기지 않는 감수성들
등록 2011-04-29 17:51 수정 2020-05-03 04:26

2003년 첫 인권 옴니버스 영화 이후 8년. 우익이 여전히 근육질 몸뚱어리에 대한 꿈으로 뒤척이는 동안, 추위에 떠는 사람들은 서로의 체온 덕에 인권 감수성을 훌쩍 키웠다. 인권을 택한 사람들의 숙명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제작하는 인권 프로젝트 ‘시선’ 시리즈 2011년 작품 는 타인의 인권 돌아보기를 넘어 이젠 구별짓기를 무지르는 광장으로 내달린다.

탈북자라는 처지의 ‘차이’

당대를 가장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지금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란다. 첫 번째 작품 ‘이빨 두 개’가 출발하는 현실은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한국 아이들과 탈북자(북한이탈주민) 아이들의 바로 지금이다. 한 번쯤 탈북자 쉼터를 돌아보라면, 탈북자 아이들을 돌보란다면 엄두를 내볼 수는 있겠다. 그러나 내 아이가 탈북자 아이 때문에 다친다면? ‘이빨 두 개’에선 배타주의의 가장 뾰족한 부분을 건드린다. 중학생 소년 준영은 학교 복도를 뛰어다니다 탈북자 출신 영옥이 휘두른 야구방망이에 맞아 이빨 두 개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한다. 준영의 부모는 억울하고 말이 막힌다. “애들끼리 놀다 그렇게 된 거긴 하지만 어찌됐건 미안하긴 하네요.” 임플란트는 또 무엇이냐는 영옥의 어머니는 아예 말이 안 통하는 듯 보이는 까닭이다. 호기심이 생긴 준영과 미안해하는 영옥은 슬금슬금 가까워지지만, 이 또한 진심을 통하기 쉽지 않다. 진심이란 무엇일까. 사귄다고 놀리는 친구들에게 “그냥 한번 놀아준 거야”라고 준영이 맞받는 말도 진심이고, 함경북도 청진이 어디쯤 있을까 북한 지도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것도 준영의 진심이다. 영화 를 만든 강이관 감독이 그려내는 소년의 마음은 풋풋하고 맑기만 하다. 그런데 탈북자 가족 셋이 앉아 하늘만 쳐다보는 좁은 아파트에선 진심이고 나발이고 그다지 소용없어 보인다. 준영의 말에 상처받는 영옥이나 담임 선생님이 너를 좋아한다고 해도 믿지 않고 “그냥 그런 척하는 거다”는 동생 영철의 말이 어떤 진심보다 무겁다. 이 영화는 결국 우리와 우리보다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온도차에 대한 이야기다. 이 차이를 모른 척하고선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으리. 실제 탈북자 출신 소녀면서 영옥 역을 맡은 신인 배우 서옥별이 영화에서 표정이 밝아지는 모습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왼쪽부터 강이관 감독 <이빨 두 개>, 김대승 감독 <백문백답>, 부지영 감독 <니마>.

왼쪽부터 강이관 감독 <이빨 두 개>, 김대승 감독 <백문백답>, 부지영 감독 <니마>.

CCTV 앞에 선 인권

5편의 연작 중 공교롭게도 2편은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이 비추는 부조리한 현실에 주목한다. 전국에 300만 대 넘게 퍼진 CCTV는 지금 권력의 가장 유능한 대리인 노릇을 한다. 정부가 추진하는 CCTV 영상정보자원 통합관제센터에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도 헌법 해석상 보장돼야 할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 제한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신동일 감독의 영화 ‘진실을 위하여’에서 CCTV는 호텔이나 병원 경영자를 대신해 노동을 감시할 때는 정확하고, 없는 사람이 돈이 든 가방을 잃어버렸을 때는 불통이다. 아이를 잃고 사과 한마디 못 듣는데다 ‘신상털기’(다른 사람의 신상정보를 퍼뜨리고 비방하는 일)까지, 영화 속 부부에게는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불행만 연달아 일어난다. 김대승 감독의 ‘백문백답’에서도 CCTV는 성폭행당한 여자에게 유리한 증언을 절대로 해주지 않는다. 영화는 피해자를 다그치는 형사의 질문을 통해 사건을 거슬러 올라간다. 배우 김현주는 광고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다 성폭력을 당하는 희주 역을 맡아 깊은 그늘을 드리운다. 그녀만이 알고 있는 진실은 피해자에게 등 돌리는 세상을 하나하나 공박하지만 그 외침은 크지 않다.

두 영화 모두 피해자 개인정보를 이용해서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고, 약한 자는 센 놈을 절대 이길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트린다. 최악으로 치닫지만 현실적으로는 꽤 정확한 기술일 수 있다. 인권을 떠받치는 것은 ‘사람은 모두 취약한 존재’라는 믿음이다. 사소한 부조리에 치명상을 입는 사람, 다음에는 당신일 수 있다. 함부로 희망을 부려놓기에는 인권영화가 담고 있는 현실도 꿈도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는 힌트를 남긴다.

시혜적 시선을 거두는 일

소통은 하나의 화제를 갖게 될 때 비로소 시작된다. 부지영 감독의 ‘니마’에선 몽골에서 온 이주여성 노동자 니마와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으리라 팔을 걷어붙인 정은이 모텔 청소를 하며 어깨를 맞댄다. 니마는 딸이 아이를 낳아도 가볼 수 없어 슬프고, 정은은 돈이 모일 때까지는 아이들을 데려올 수 없어서 슬프지만 쉽사리 말을 섞지는 못한다. 모텔은 배설의 공간인가. 방에 배설물을 싸지르며 광란의 파티를 벌이는 사람들과 모텔방에 여자를 끌고 와서 두드려 팰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어딘지 닮았다. 배설물을 함께 치우고 모텔방에서 두드려 맞는 여자를 구해주러 나서며 둘의 소통이 시작된다. 게다가 적극적으로 손을 내미는 사람은 단속이 뜰 때마다 방 안에 숨어야 하는 불법체류자 신세의 니마다.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인권의 황금률을 그녀가 먼저 내밀었다. ‘니마’는 연대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영화다. 배설의 공간이던 모텔을 자장가가 깃드는 안식의 공간으로 바꾸는 힘 말이다.

윤성현 감독의 ‘바나나 쉐이크’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불신의 눈초리는 물론이고 아예 이주노동자는 피해자, 한국 사람은 가해자라는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동성애를 그린 영화를 보다 보면 새삼 나는 어느 쪽인지 물어야 할 듯한 강박을 가질 때가 있다. ‘바나나 쉐이크’는 관객의 정체성을 묻지 않는다. 이삿짐센터에서 일하는 4명은 평등하다. 굵은 땀을 흘리며 짐을 날라봤자 그중 어느 하나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줄곧 이사를 거들어도 자신들은 여행 한번 못 떠나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물론 이사 도중 집주인의 귀금속이 없어지자 가장 먼저 닦달당하는 것은 이주노동자인 알빈이다. 문제는 봉주도 훔쳤고, 알빈도 훔쳤다는 사실이다. 비디오가게를 하다 망해서 이삿짐을 나르는 봉주나 필리핀에 임신한 아내를 두고 있는 알빈이나 딱하기는 마찬가지, 순결하지 않기도 마찬가지다. 봉주는 알빈에게 “너는 그게 안 들킬 거라고 생각했느냐”고 타박하지만 봉주 또한 허술한 좀도둑일 뿐이다. 인권 조항의 하위 목록을 넓혀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혜적 시선을 거두는 일일지 모른다. 서른 살의 젊은 감독은 인권을 말하며 굳이 자신을 주체로, 남을 객체로 세우려던 관습을 흔든다.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집주인 앞에서 봉주는 무릎 꿇고 사정한다. “사장님, 그게 아니라요, 아 씨, 왜 남의 일인데 눈물이 나죠.” 남의 일이라며 눈물을 흘리는데다, 알고 보면 남의 일도 아니다. 나와 남을 하나로 여길 때 눈물은 힘이 세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이주노동자 그린 ‘바나나 쉐이크’ 윤성현 감독
“절망적인 인생에 이상향을 주고 싶었다”

윤성현 감독

윤성현 감독

올해 신인감독 잔치 속에서도 윤성현은 가장 주목받는 감독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커런츠상을 받은 첫 장편영화 이 1만7천 명 관객을 넘겼고, 의 4번째 작품 ‘바나나 쉐이크’에선 유쾌한 인권영화로 관객을 찾는다. 1982년생 젊은 감독이 생각하는 인권의 모양을 들어봤다.

Q. 이주노동자를 택한 이유는.
A. 외지에서 한국 사회로 온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고, 그들을 향한 편견에 늘 불편함을 느꼈다. 그들을 도와줘야 하는 불쌍한 사람들로 대하는 시각이 불편하다. 그들과 우리가 다르다는 전제가 가장 큰 폭력이라는 것에서 출발했다. 마찬가지로 한국 사장은 나쁘다는 편견을 깨려고 부러 온순한 사람으로, 부르주아적 집주인도 마음 약한 사람으로 그리려 했다.
Q. 알빈 역을 맡은 배우는 실제로는 네팔 사람인데 필리핀 사람으로 그렸다.
A. 영화 말미에 봉주와 알빈이 보라카이 여행 광고 간판을 보며 언젠가는 저곳에서 살리라고 이야기를 나눈다. 돈을 벌려고 열악한 생활을 견디는데 실제론 희망이 없다. 이뤄질 수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몰라도 절망적인 인생들에게 이상향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비행기를 끊임없이 띄우고 보라카이 이야기를 나눈다. 바나나 쉐이크도 마찬가지다. 주인공들이 늘상 이야기는 하지만 마시지는 못한다.
Q. 주인공들도 철로에서 노는데, 감독이 떠나는 인생을 동경하는 것 아닌가.
A. 삶이란 게 별거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한국 교육 시스템 속에서 자라며 너무 많은 허상을 봐왔고, 그렇게 도달하는 인생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었다. 어쨌든 어딘가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는데, 내겐 영화가 이상향이다.
Q. 영화 후반부가 전반부만큼 긴데.
A. “봉주야, 내가 가게 차리면 나를 사장이라 불러라” 같은, 알빈의 얘기가 나오는 것도 후반부다. 장편영화에서는 생략을 추구했다. 세련된 화술은 생략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인권영화는 달라야 할 것 같았다. 촌스럽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하고 싶었다. 후반부 봉주가 알빈에게 “너 저렇게 좋은 곳 살면서 한국에 왜 왔느냐” 묻는데, ‘코리안 드림’ 때문에 왔다는 생각이면 그건 착각이다. 미국으로 건너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한국엔 드림이 없다. 못사는 나라 사람들이 와서 한국에서 꿈을 펼친다는 조잡한 편견을 담은 단어다. 알빈은 꿈도 없는 곳에 돈 때문에 왔다. 그게 가장 비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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