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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탐정은 조선 멍탐정?

탐정영화 본연의 매력과 특징 살리지 못한 채

사소한 슬랩스틱이 도드라지는 퓨전 사극 영화 <조선 명탐정>
등록 2011-01-28 11:12 수정 2020-05-03 04:26

최근 한국의 사극 영화들은 역사의식보다는 오락적인 각색을 앞세운, 이른바 ‘퓨전사극’이라고 일컫는 장르에 승부를 걸어왔다. ‘퓨전’이라는 수사가 붙은 모든 것이 그러한 것처럼, 퓨전사극 역시 실은 그 정체가 모호한데, 주로 (정통)사극에 대한 저항이나 전복보다는, 말 그대로 이것저것을 뒤섞은 유희에 목적을 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 유희는 현재 시점에서 통용되는 대중적인 개그의 첨가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탐정의 본분 잃은 채 캐릭터 구축에만 힘써

<조선 명탐정>

<조선 명탐정>

하지만 생각해보면 과거와 현재, 고증과 변주, 역사적 사건과 허구적 재미의 충돌과 혼종 속에 놓인 퓨전사극은 어떤 장르보다도 균형감각을 요한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한국 영화는 그 균형감을 찾는 데도, 그걸 끝까지 지켜내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게 개별 작품의 완성도와 관련된 문제일 수도 있고, 퓨전사극이라는 불분명한 장르적 정체성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2시간 남짓한 영화의 평균 러닝타임은 이 장르의 혼종성에서 틈틈이 재치 있게 자잘한 에피소드를 끌어내면서도 중심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데 다소 짧거나 효율적이지 않다는 인상을 종종 준다. 퓨전사극의 인기가 영화보다는 텔레비전 드라마 시리즈에서 상대적으로 더 높게 나타난다는 사실, 그리고 퓨전사극 영화들을 볼 때마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볼 때의 느낌을 막연하게 갖게 되는 건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일관된 밀도의 유지보다 호흡의 맥이 불균질하게 끊기는 이완의 순간에서 오락을 생산하려는 이 장르의 특성은 한 편의 영화보다는 몇십 부작으로 이어지면서도 유기성에 구애를 덜 받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좀더 유리한 방식일지 모른다. 공교롭게도 방송사 PD 출신으로 시트콤 를 동명의 영화로 만들었던 김석윤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든다.

때는 1782년 정조 16년, 정조는 일부 관료가 공납 비리에 연루돼 있다는 짐작을 하고 조선 최초의 명탐정(김명민)에게 사건을 밝혀내라는 임무를 내린다. 그는 이 음모의 첫 번째 공모자가 마을의 사또임을 알게 되는데,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또는 자객에게 살해된다. 죽은 사또의 목 뒤에서 각시투구꽃의 독 자국을 발견한 그는 우연히 알게 된 개장수 서필(오달수)과 함께 각시투구꽃을 특산물로 재배하는 적성으로 향한다. 열녀 감찰이라는 미명으로 적성에 입성하자마자, 그는 이 마을의 비밀을 감지하고 그 비밀과 거대 상인 한객주(한지민)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조선 최초의 탐정극’으로 스스로를 명시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건 도대체 조선시대의 탐정은 어떤 모습일까에 대한 것이다. 일단 그는 19세기 유럽의 셜록 홈스, 무능한 경찰을 대신해 자본주의 신흥 세력인 부르주아 계급을 보호하는 사립탐정이 아니라, 정5품의 벼슬에 해당하는 관료로서 법을 집행하는 자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에서처럼 범죄를 추적하는 수사관이 아니라 굳이 탐정을 내세운 이유는 뭘까? 그건 영화가 그에게 단순히 사건을 추리하는 서사상의 역할만을 맡긴 게 아니라 탐정이라는 이미지가 지닌 개별성, 달리 말해 그 캐릭터에 적극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다. 셜록 홈스가 이성적인 탐정이지만 지독한 우울증자였다면, 조선 명탐정은 엄격한 관료지만 어딘지 어눌하고 푼수기 다분한 남자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가 탐정의 캐릭터 구축에만 힘을 쏟은 나머지 탐정의 본분을 지나치게 소홀히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추리의 계단을 거의 쌓지도 않고 사건의 배후와 해결 과정을 비약적으로 한꺼번에 쏟아내는 후반부의 엉성함도 거슬리지만, 탐정영화로서 갖춰야 할 최소의 영화적 리듬이나 화법, 구조에 대한 고민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이 영화의 가장 큰 결함이다. 요컨대 가장 긴박해야 할 시퀀스들에서 카메라는 종종 사건의 행로와 비밀을 미리 알고 움직이고, 인물들은 그저 카메라의 뒤를 따라가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영화는 과잉된 카메라워크에서 긴박감이 생긴다고 오해하는 것 같지만, 그때 관객의 주의는 사건이 아니라 인물들의 단편적 슬랩스틱으로 느슨하게 분산될 수밖에 없다.

사건의 비밀을 쥐고 있는 유일한 여자 인물 한객주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 아니 애초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도 영화 중·후반의 맥을 풀어지게 하는 주요 요인이다. 영화는 이런 장르에 등장하는 팜므파탈의 역할, 이를테면 오인의 구조 속에서 그녀가 담당하는 디테일들을 버려두고 오직 팜므파탈의 외형에만 치중하고 있다. 그녀의 미가 내러티브의 일부로 기능하는 게 아니라 클로즈업 안에서, 혹은 카메라의 시선 속에서 영화 맥락과 동떨어진 채 소모되고 있다는 것. 최근 한국 영화가 여배우들의 클로즈업을 소진하는 방식을 이 영화 역시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다. 인물들이 붙들고 풀어야 하는 뼈대가 미로 같은 오인의 구조가 아니라 단편적 에피소드처럼 플래시백으로 툭툭 던져질 따름이어서, 영화의 후반 수수께끼가 풀린다는 느낌 또한 들지 않는다.

코미디와 숭고함의 불편한 간극

퓨전사극의 매력은 그것이 완전한 가짜는 아니면서도 지금 여기와는 다른 어딘가,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혼종된 미지의 시공간에 대한 매혹에 기반할 것이다. 그 매혹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왜 하필이면 그 시대로 돌아가야만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의 내적 필연성에 대한 영화적 고민 또한 뒤따라야 한다. 은 평등사회에 대한 노비들의 열망, 천주교 박해 등 당대의 시대상을 탐정극의 근간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줄곧 코미디에 매달리던 영화도 그 순간들을 전면화할 때만큼은 괴이할 정도로 숭고해지려고 한다. 하지만 그 간극은 불편하다. 아무리 오락영화라고 해도, 역사적 타자들을 탐정극 안으로 불러들여 ‘실은 이것이 영화의 진심’이라고 짐짓 심각해질 때, 영화는 자신이 그나마 유일하게 공들였던 가벼운 웃음의 성취마저 무너뜨리는 것 같다.

남다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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