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증권회사의 같은 지점 동료들이 한꺼번에 낯선 시골로 발령받는다. 이름부터 생소한 그곳은 생초리. 옛날 옛적 서부영화에나 나올 법한 사막 같은 벌판에 날림으로 지어진 사옥 한 채만 덩그러니 있는 이곳은 “전기도 수도도 인터넷도 안 터지는” 흡사 무인도 같은 곳이다. 다 쓰러져가는 사택에서 공동생활까지 해야 하는 삼진증권 생초리지점 직원들의 수난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허허벌판에 드리운 신자유주의의 그림자
그런데 이 도입부, 그리 낯설지 않다. tvN (이하 )의 시작은 사실 제작진의 전작인 문화방송 시트콤 과 겹쳐지는 지점이 있다. 역시 한 회사의 같은 부서 직원들이 다 함께 낯선 곳에 불시착하는 데서 시작되며, 그들이 머물게 되는 무인도는 생초리 못지않게 비밀스런 사연을 품고 있는 곳이다. 같은 회사의 직원이 의문의 시체로 발견되는 스릴러의 틀까지 흡사하다. 와 은 말하자면 김병욱 사단이 기존까지의 가족 시트콤 세계를 벗어나 직장이라는 정글에서 발견한 시트콤의 새로운 개척지라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그러나 두 작품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 은 평소 억압적인 회사 질서에 지배당하며 일상 너머를 꿈꾸기 어려운, 무력하고 무료한 직장인들의 탈일상 판타지에 가까웠다. 그리하여 크크섬은 직장 내의 위계 관계가 새로운 삶의 방식에 의해 재편되기도 하고 직장 내 처세술에 가려졌던 맨얼굴의 진실이 드러나기도 하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공간이었다. 이에 반해 는 더 가혹하고 현실적인 세계를 그린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 시스템 외곽으로 밀려난 직장인들의 서바이벌 버라이어티에 가깝다.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에 봉착한 삼진증권은 구조조정 전문가 박규(김학철)를 신임 사장으로 고용한다. 군사독재식 성과주의의 신봉자인 박규의 등장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보이는, 억압적 권위주의와 개발 이데올로기의 위풍당당한 귀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신속하게 구조조정되는 삼진증권 지점 중 정리해고 대상 1순위는 영업실적에서 6개월째 독보적인 꼴찌를 달리고 있는 가리봉지점이다. 가장 같은 지점장 만수(강남길)를 중심으로 실적보다 인간적인 관계와 놀이에 더 매진하는 가리봉지점 직원들의 가족 같은 분위기와 인간미는 박규 체제하에서는 무능의 상징일 뿐이다. 결국 그들은 자발적 퇴사를 끌어내기 위한 박규의 계획으로 하루아침에 허허벌판 오지의 생초리지점으로 쫓겨난다. 사장의 의도가 뻔히 보이는데도 과감하게 그만둘 용기도 없는 그들은 탈출과 역전을 꿈꾸기는커녕 당장 하루하루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직장인들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의 세상은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장악당한 출구 없는 세상 위에 황량하게 서 있는 희비극의 세계다.
이 세계의 속성을 더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생초리라는 공간이다. 얼핏 한가롭고 소박한 전원 공동체로 보이는 이곳은 실은 정부가 추진하는 첨단기술 신도시 계획으로 받게 된 1천억원대의 토지보상금을 둘러싸고 음습한 비밀을 공유한, 자본에 대한 욕망이 원초적으로 집약된 곳이다.
“1은 가장 쓸쓸한 숫자예요”
생초리의 토지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이장(우상전)은 이 “마을의 법”으로 군림하며, 주민들은 철저히 그의 명령과 지시 아래 행동한다. 이장은 마을 곳곳에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을 설치하고 외지인을 비롯한 마을 전체를 수시로 감시한다. 만화 의 마을을 연상시키는 생초리의 이 억압적이고 전근대적인 시스템은 개발로 부를 축적하는 군사독재 시절의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압축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생초리와 삼진증권의 만남은 일견 전근대와 초현대의 충돌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성격을 지닌다. 는 각 공간의 독재자인 이장과 박규의 우스꽝스러운 대립을 통해 첨단기술 시대로 포장된 우리 시대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진짜 얼굴이 사실은 전근대성에 가깝다는 것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는 또한 모든 것을 경제 논리로 환산하는 현실을 냉정한 숫자들의 세계로 압축해서 보여준다. 증권회사라는 배경은 그 세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설정이며, 직원들의 가치는 오로지 그들이 올린 실적의 숫자로 결정된다. 이러한 시스템의 수호자인 박규는 모든 일을 5초 내에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5초 플랜’의 전도사이고, 생초리지점 직원들은 앞으로 3개월 안에 100억원의 투자 유치에 성공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생초리 마을 주민들이 어두운 비밀을 숨긴 채 공유하고 있는 토지보상금 1천억원 외에, 삼진증권 가리봉지점 직원 김도상의 의문의 죽음 뒤에는 그의 차명계좌에 들어 있는 거금 30억원이 연루돼 있다. 숫자가 지배하는 이 세계에 최적화된 인물이었던 숫자 천재 민성(하석진)이 벼락을 맞고 하루아침에 수의 개념을 모두 상실해버리는 설정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숫자치’가 된 그의 눈에 비치는 숫자들은 더 이상 세상의 모든 것을 수량화하는 절대 가치가 아니라 무의미한 기호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하여 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핵심적인 신은 민성이 나영(남보라)에게 산수 과외를 받는 8회의 한 장면이다. 수에 대한 나영의 재해석은 기계적이고 냉정한 숫자의 세계에서 그 기호가 축소하고 차단해버리는 다른 삶의 가치와 가능성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해준다. 나영은 말한다. “1은 되게 외로운 숫자예요. 가장 앞에 나와 있고 가장 위에 있는 숫자지만 그만큼 혼자라서 외롭대요. 외로운 1이 서로 만나게 되면 2가 돼요. 2는 가장 행복한 숫자래요. 둘만 있을 수 있으니까.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고 언제나 함께할 수 있는 숫자잖아요. 그리고 3은 가족 같은 숫자래요.” 나영의 말은 단순하지만 민성을 지배하던 성과주의 시스템이 상징하는 ‘1’의 세계의 쓸쓸한 이면을 돌아보게 하고, 관계와 연대의 수인 ‘2’의 삶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순수한 울림을 갖는다. 이 말 뒤로 민성과 나영은 단순한 ‘갑과 을’의 관계에서 조금은 친밀하고 인간적인 관계로 변화하게 된다.
관계, 출구 없는 ‘생초리’의 유일한 희망
숫자의 논리를 넘어설 더 큰 가능성은 바로 ‘3’의 세계 안에 있다. 생초리지점 직원들은 하나같이 가족과 동떨어져 외롭고 쓸쓸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각자 서로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지만 공동생활을 통해 점차 ‘대안가족’의 가능성을 형성해간다. 가족을 타국에 보내고 그리움에 눈물짓는 만수는 직원들을 돌보려 하고, 결혼할 남자에게 파혼당한 은주(이영은)는 자신에 대한 순정을 숨기고 있는 지민(김동윤)으로부터 위로받는다. 외롭던 산골 소녀 나영 역시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관계의 소중함을 배워간다. 물론 스릴러의 특성상 이들 중 누군가는 연쇄살인의 범인 혹은 피해자가 되겠지만, 그것이 근본적으로 그들의 관계가 만들어가는 성장의 가능성을 해치지는 않는다. 출구 없는 ‘생초리’의 세상에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바로 그 사람과 사람의 관계 안에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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