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아영(유인나)이 목에 묶은 꽃무늬 스카프를 만지며 길라임(하지원)에게 묻는다. “어때? 완전 귀엽지?” “목에 땀띠 안 나냐?” “야, 남자들은 이렇게 은근 감춰줘야 더 좋아해.” 길라임은 목에 남색과 붉은색 스트라이프 스카프를 매고 클럽에 들어간다. 김주원(현빈)은 길라임의 스카프를 보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혹시 목 다쳤어? 지혈해?” 길라임은 당황한 듯 목에 두른 스카프를 풀어버린다. SBS 주말드라마 3회에 등장하는 한 장면이다.
오드리 헵번부터 길라임까지
로맨틱 코미디 영화 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후루룩 쩝쩝, 입속의 소화 과정을 다 내보이며 자장면을 먹던 다림(최강희)은 정배(이선균)와의 키스 뒤 갑자기 변한다, 여자로. 다림은 왼손으로 오른쪽에 내려오는 머리를 감싸올려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자장면을 한 가닥씩 낚아올리며 식사를 한다. 즐겨입던 짧은 치마 등속의 옷은 변한 게 없다. 사랑스런 화장법과 함께 그녀의 변신을 극적으로 대비해 보여주는 것은 그녀가 목에 맨 스카프다.
목에 맨 한 장의 스카프. 길라임에게는 ‘당신에게 여자로 보이고 싶어요’라고 흘리는 사인이고, 다림에게는 ‘나는 당신의 여자’임을 보여주는 징표다. 오드리 헵번은 영화 에서 공주에게 허락된 단 하루의 휴일 동안 목에 스카프를 두른다. 그 옆에는 짧은 휴가를 함께 보내다 사랑에 빠지는 남자 그레고리 펙이 있음은 물론이다. 프랑스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1879)는 한때 마네가 연애편지를 보내며 사랑했던 여인 이자벨 르모니에의 초상이다. 그림 속 이자벨은 어두운 갈색 코트에 흰색 스카프를 두르고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고 있다.
목은 여성의 신체 중 성적인 코드가 다분히 드러나는 부위다. 목은 턱에서부터 마치 허리선처럼 잘록하게 들어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어깨까지 이어진다. 목은 애써 감추지 않는 이상 옷을 입으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유일한 부위이고, 예민하고 민감한 성감대이기도 하다. 뱀파이어가 여성의 목을 물고 피를 탐하는 모습은 성적인 행위에 빗대지기도 한다. 사랑에 빠진 그녀들은 왜 목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걸까.
그래서 이토록 여성성을 잔뜩 담고 있는 목을 한 장의 스카프로 가리는 것에는 두 가지 전략이 담겨 있다. 하나는 감추면서 오히려 드러내려는 전략이다. “은근 감춰야 더 좋아”한다는 아영의 말처럼. 실크스카프나 얇은 천의 손수건을 접어 목에 두르고 옆이나 앞으로 매듭을 지어 묶은 모습은 오히려 목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평소처럼 드러냈을 때는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목이 스카프를 두름으로써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얘기다. 그 매듭을 풀어버리면 목이 제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 기대는 덤이다.
또 한 가지는 목을 감추면서 당당함과 우아함을 드러내는 전략이다. 작은 스카프로 짧게 매는 게 아니라 긴 스카프를 목에 휘감듯 두르면 전체적인 실루엣이 부드러워지면서 우아한 여인이 된다. 패션모델 장윤주와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은 (시공사 펴냄)에서 이렇게 썼다.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다면? 보다 우아한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싶다면? 나는 주저 없이 말하겠다. 당신의 목에 스카프를 두르라고. …에서 오드리 헵번의 목에 짧게 매어졌던 스트라이프 스카프도 그렇고, 히치콕의 영화에서 그레이스 켈리의 목에 매어졌던 실크스카프도 그렇고. 스카프는 언제나 사람들을 당당하면서도 우아하게 보여주는 아이템이다.” 그레이스 켈리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인 재클린 케네디가 실크스카프와 진주목걸이, 커다란 선글라스, 트렌치코트 등 우아함을 더하는 아이템을 함께 매치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목도리의 변신은 자유봄·여름·가을에 두르는 스카프에는 이유와 전략이 있지만 겨울에는 이유가 없다. 추우니까. 한겨울 찬바람에 가장 취약한 신체 부위를 꼽으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단연 목이다. ‘방한·방진 또는 장식을 목적으로 목에 두르는 것’을 모두 목도리라고 부른다. 목도리 하면 긴 직사각형 모양의 천과 함께 이를 목에 두 번 정도 감은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제는 목도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할 때다.
목도리가 두꺼워졌다. 울 소재가 아닌 니트 소재의 목도리가 지난해부터 부쩍 많아졌다. 손으로 짠 것처럼 올이 굵어 투박한 느낌마저 드는 니트 소재 목도리는 목에 두르면 어깨선에 닿을 만큼 두툼해진다. 자칫 답답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불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따뜻한 느낌을 극대화할 수 있어 올겨울 패션 아이템으로 각광받고 있다. 심정희 패션에디터는 “옛날 옷장에서 막 꺼낸 것 같은 1960년대나 70년대 초반의 빈티지한 느낌을 주는 두꺼운 니트 목도리가 유행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 초 문화방송 드라마 에서 이선균이 두르고 나온 목도리나 지금 방송 중인 한국방송 드라마 에서 문근영이 자주 두르고 나오는 목도리가 모두 니트 소재다. 니트 목도리는 편하게 입는 캐주얼룩과 특히 잘 어울린다. 여성의 경우 두꺼운 니트 목도리는 풀었을 때 드러나는 목에 반전 효과를 주기 때문에 여성성을 드러내기에 더없이 적당하다.
올해 겨울 패션 트렌드와 관련해 자주 듣는 단어는 ‘워머’(warmer)다. 워머는 목이나 팔, 다리, 엉덩이 등 특정 부위의 보온을 목적으로 제작됐다. 옷 위에 겹쳐입을 수 있어 겨울에 특히 주목받는 ‘레이어드룩’을 완성하기에 중요한 아이템이기도 하다. 그중 넥워머는 변형된 형태의 목도리로, 목도리처럼 휘감아 두르는 게 아니라 목까지 올라오는 터틀넥 스웨터의 목 부분만 따서 만든 듯한 원형고리 형태다. 통이 좁은 것부터 어깨까지 두를 수 있을 만큼 넓은 것까지 다양하다. 넥워머는 두꺼운 니트 소재로 만드는 게 보통이다. 굵은 니트 짜임의 넥워머는 자연스럽게 어깨로 흘러내려 조금 더 스타일리시한 분위기를 낼 수 있다. 털만으로 이뤄져 폭신한 느낌의 넥워머나 무스탕 소재에 버클을 달아 강렬함을 더한 넥워머도 있다.
기본형 목도리와 워머, 모자 등이 결합하는 형태의 변화도 눈에 띈다. 옷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를 해체해 재구성하는 방식의 패션이 일반화되면서 목도리 같은 패션 액세서리 역시 ‘늘 그래왔던’ 모양이 아닌 ‘이럴 수도 있나’ 싶은 모양으로 바뀌는 중이다. 그 결과물로는 목도리와 모자가 결합한 형태나 넥워머에 목도리가 달린 형태, 모자와 넥워머가 공존하는 형태 등이 있다. 모자가 달린 목도리는 모자를 쓰고 자연스럽게 목도리를 두르게 구성돼 있다. 니트 소재나 털로 따뜻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터틀넥 스웨터의 목 부분처럼 좁은 통으로 만든 넥워머에 목도리를 연결한 제품과 모자에 넥워머를 연결해 모자를 쓰면 목 부분까지 따뜻해지는 제품 역시 올겨울 독특한 목도리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기에 딱 좋은 아이템이다.
사인을 알아채는 센스는 필수꼭 머리를 자르거나 짧은 스커트를 입어야만 ‘심경의 변화’를 나타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목에 두른 얇은 스카프나 두꺼운 니트 목도리만으로도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을 슬며시 내보일 수 있다. 목으로 말하는 은밀한 사인을 모두가 알아듣는 건 아니다. 의 김주원처럼 감지하기는커녕 면박을 주는 눈치 없는 인간도 있으니까. ‘눈치 있는’ 남자라면 눈앞에 앉은 여자가 목에 무언가를 둘렀을 때 그게 어떤 의미인지, ‘나를 향한 그녀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채기를. 그래서 그 은밀한 사인에 자신 있게 화답하기를 바란다.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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