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만 해도 벌써 세 편이다. 정유미 주연의 가 잇달아 개봉했다. 지난해에는 주연작 을 비롯해 무려 9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장편, 단편, 주연, 조연, 카메오 가리지도 않는다. 정유미는 요즘 충무로에서 가장 많이 캐스팅되는 여배우일 것이다.
이리 많은 영화에 출연할 줄 누가 예상했으랴청춘의 찰나적 떨림을 잘 포착한 김종관 감독의 단편 (2004)에서 해사한 얼굴로 앳된 눈망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연방 뺨을 발그레 물들이던 그녀를 잊을 수 없다. 흡사 다큐멘터리처럼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그녀의 눈빛은 수줍고 서툰 짝사랑의 설렘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정유미가 아니었던들 아스라한 봄 햇살 같던 그 느낌을 어찌 전달할 수 있었으랴. 책갈피 사진 같던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소녀’ 이미지는 (2005)에서 입체화된다. 서른 살 주인공의 회상인 듯 존재하던 17살 조인영이 현재에 불쑥 나타났을 때, 관객은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은 첫사랑을 추억하며 활용하는 장르물인 양 진행되던 영화가 사실은 첫사랑 판타지를 거부하고 불온한 현재의 욕망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아챈 데서 온 게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안온한 상상의 시공간에 있을 법한 소녀가 갑자기 과거·현재, 상상·실제의 장막을 뚫고 현실로 뛰쳐나온 듯한 그녀의 불안하고 상기된 표정에서 감각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정말 세상 끝 어디에선가 뛰어온 것처럼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우왕좌왕 자주 핸드헬드 카메라의 프레임을 벗어났다. 관객은 살짝 현기증을 느끼며 소녀의 낙망에 아찔하게 교감했다.
는 정유미에게 신인여우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백상예술상)을 안겼지만, 그때만 해도 정유미가 이렇게 많은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정유미의 해맑은 눈매는 시절의 심은하를 떠올리게 하고, 귀엽게 삐죽 내미는 듯한 윗입술은 시절의 배두나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예쁘면서도 일상적인 느낌이 난다. 이것은 양날의 칼이다. 정유미의 외모는 주목성이 없고, 관능성이 없고, 정형성이 없다. 그녀의 얼굴은 주위를 집중시키거나,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아우라를 발산하지 않는다. 말간 얼굴과 여린 몸매는 성적인 매력과 거리가 있으며,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또한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기대되는 안정감이나 노련함이 없이, 불안스럽게 흔들리고 꽉 채워지지 않은 여백이 느껴진다. 그런 탓에 신인으로서의 풋풋함은 느껴지지만, 주연급 여배우의 위엄을 갖출 수 있을지는 불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들은 그대로 장점도 됐다. 주목성이 없는 얼굴은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고, 관능적이지 않은 외모는 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정형화되지 않는 그녀의 이미지는 비주류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겨, 엉뚱하고 특이한 캐릭터와 잘 어울렸다. 그 결과 (2006)에서 배타적 이성애 관계에 묶이지 않는 ‘헤픈 여자’라는 비전형적인 인물이 재현될 수 있었다. 그녀는 어디서 본 적도 없고 상상된 적도 없는 캐릭터였지만, 정유미의 채연은 세상 어딘가에 저런 여자가 있을 것 같은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핵심적으로 제시하는 ‘기이한 대안성’이 그녀의 몸을 통해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다. 에서 정이 많으면서도 자아가 굳건한 외유내강의 이미지는 이후 좀 다르게 변주된다.
여리면서도 강단 있어 보이는 그녀의 외모는 사회 변두리의 소외받는 루저이면서도 자신만의 꿈이나 오롯한 자존감 하나만으로 버텨내는 캐릭터들과 잘 맞는다. (2007)에서 원조교제로 생계를 꾸리면서도 발레리나를 꿈꾸는 소녀나, 에서 고시원 쪽방에 살면서 번듯한 집을 꿈꾸는 학습지 교사나, 에서 커리어우먼의 꿈을 놓지 않는 취업준비생의 모습은 모두 정유미의 외유내강 이미지가 활용된 예다. 그녀는 에서 노숙자와 같은 위상에 놓이고, 에서 3류 건달과 나란히 놓이지만, 그것이 무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안쓰럽게 매달린다. 그녀들의 꿈은 허황되게 느껴지기보다, 현실을 지탱해주는 마지막 자존심으로 보인다. 에서 정유미는 자기 주검이 방치되는 것이 두려워 노숙자와 그녀를 집에 들인 친절한 아주머니의 죽음을 방기한 채, 주검과 더불어 큰 집에 사는 것을 택한다. 그녀의 ‘징그러운’ 욕망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던 건 정유미가 온몸으로 뿜어내는 절실함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의 다소 동화적인 해피엔딩도 흠결로 느껴지지 않는다. 에서 정유미는 가난한 청춘의 표상으로 잘 어울리기도 했지만, 더 큰 공로는 3류 깡패 박중훈과의 언밸런스한 로맨스를 설득력 있게 만든 데 있다. 나이와 계층차가 큰 남자가 품는 미묘한 애정이 희화화되지 않고 순수한 마음처럼 보이게끔 하는 여배우가 정유미 외에 누가 있을까. 이런 ‘정유미 효과’는 에서도 발휘된다. ‘B급 감수성’으로 충만한 엉뚱하고 괴팍한 영화 에서 윤제문이 정유미에게 반하는 것이 사심 없고 심지어 귀엽게 느껴진 것은 정유미의 맑고 편견 없어 보이는 특이한 이미지 덕분이었다.
그녀의 편견 없어 보이는 해맑음을 짓궂을 정도로 뒤집어 활용한 예가 과 다. 정유미의 예쁘면서도 일상적인 얼굴은 어느 집단에나 한두 명씩 있는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가만히 보면 참 예쁜’ 여자를 표상한다. 그녀의 주위엔 ‘그녀의 예쁨을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무구한 남자들이 꼬인다. 직선적이고 저돌적인 대학생 진구가 옥희에게 “네가 제일 예쁘고, 제일 똑똑해. 다른 애들은 다 유치해”라고 말하며 들이댄다. 왜 아니겠는가? 문제는 그걸 아는 사람이 진구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학교에 무슨 약 탔나봐. 나만 좋대.”) 그리고 그녀의 “유치하지 않은 똑똑함”이 바로 유치한 또래 남자들이 아닌, ‘나이 든 남자’를 향하게 돼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문 앞에서 밤을 새운 진구를 이부자리로 불러 안아주면서, 동시에 교수와 속 깊은 정을 나눈다. 그녀는 오는 남자를 막지도 않지만 그 마음을 다 주지도 않는 다면적 욕망을 지닌 여자를 구현한다. 그녀의 다면적 욕망은 로맨틱 코미디에 등장하는 ‘내숭’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녀는 매 순간 자신의 욕망에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게 몰입하며, 가식이나 계산 없이 자신의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우리는 무수한 ‘진구들’최근작 는 순간적인 감정에 몰입하는 캐릭터의 끝을 보여준다. 그녀는 변심한 남자에게 스토커처럼 나타나, 모든 여자들이 속으로는 골백번을 더 되뇌었으나, 자존심이 상하고 망가지는 것이 두려워 감히 해보지 못한 모든 ‘진상’ 발언들을 토해낸다. “나 연애 불구 됐어. 넌 벌받아야 돼”라고 말하며, “밥 사달라, 같이 자자”고 매달린다. 그녀는 새로 만난 애인이 있지만, 그가 자신에게 몰입하지 못하자 옛 애인에게 “너 때문”이라고 말하는 중이다. 이토록 모순된 욕망 앞에서 그녀는 거짓이 없다. “걔랑 안 되면 나 또 괴롭히러 올 거야”라고 말하는 그녀의 솔직함 때문에 오히려 미워할 수 없다.
충무로는 지금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가만히 보면 참 예쁜’ 정유미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 오직 ‘나만이’ 그녀의 예쁨을 알아보았다고 착각하는 무수한 ‘진구들’이 그녀의 문 앞에 줄을 서는 중이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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