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칼럼니스트 박사씨는 얼마 전 아이폰4를 구입하고 기기에 꼭 맞는 케이스와 거기에 연결해 사용하는 블루투스 키보드 케이스를 직접 만들었다. 아이폰 케이스는 안 입는 바지를 잘라서 파우치 형태로, 키보드 케이스는 오래된 노트북 가방을 활용해 제작했다. “워낙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필요한 물건을 종종 만들어서 사용해요. 가구나 가방, 책도장 같은 걸 만들죠. 퀼트나 자수도 배워뒀어요. 아이폰 케이스는 파는 것만큼 튼튼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저만의 미감과 정서가 담겨 있어서 좋아요. 각별하죠. 요즘은 싼값에 다양한 디자인의 제품을 살 수 있어 굳이 만들어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들고, 실제 만드는 데 더 많은 돈이 드는 경우도 있어요. 그럼에도 직접 디자인해서 만드는 이유는 딱 하나예요. 유일무이하다는 거.”
여러 권의 책을 낸 박씨는 책에 실리는 그림이나 원고에 필요한 그림을 자신이 그린다. 그림을 전공하거나 따로 배운 적은 없다. “전문적인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림을 그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저는 조금 부족하더라도 제가 보고 느낀 걸 직접 그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저는 한 명의 사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직접 해내는 ‘전인적 인간’의 가치를 추구해요. 전문가들만큼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나에게 맞고 내가 좋아하는 걸 스스로 해내고 싶어요. 실제 내 생활에 맞춤한 것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잘 만들 수 있잖아요.”
“디자인은 아이디어를 포장하는 대중적 예술”
서비스 대신 가격 절감을 선택한 ‘물은 셀프’는 ??언제?? 식당문화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그런데 이보다 적어도 30년 일찍 등장했고 이보다 더 혁명적이며 전복적인 문구가 있었으니, ‘너 스스로 하라’는 의미의 ‘두 잇 유어셀프’(DIY)다. DIY는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며 대량생산 체제로 접어든 1960년대에 일어난, 공장에서 찍어낸 똑같은 물건보다 필요한 물건을 손으로 직접 만드는 수공예의 가치를 중시하는 움직임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주로 생겨났다. 이후 예술 역시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며 펑크신이나 독립출판·잡지와 손잡고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를 지워나갔고, 1990년대 음악과 미술, 출판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담론이 됐다. 자본주의의 주요 가치인 기계와 기술, 소비, 전문가를 거부했다는 것만으로도 DIY는 도발적이었다.
지금 우리는 DIY 하면 하늘하늘한 레이스 커튼이나 만질만질한 가구를 떠올린다. DIY는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 스스로 집을 수리하고 꾸미는 규격화된 방법으로서의 DIY 시장을 형성하는 데 그치는 듯했다. ‘그랬던’ DIY가 디자인이 상품 최고의 가치로 떠오르는 요즘 ‘두’(Do)에서 ‘디자인’(Design)과 ‘드로’(Draw)로 구체화되면서 그 가치가 변화하고 있다.
미국 메릴랜드 예술대학의 엘런 럽튼 교수는 2005년 미술 석사과정 학생들과 함께 디자인을 전혀 모르는 이들이 시각적 언어로 자신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이 프로젝트는 2006년 미국에서 <D.I.Y. Design It Yourself>라는 책으로 묶여나왔고, 국내에는 2007년 <D.I.Y. 디자인! 쉽게 배우고 따라하기>(비즈앤비즈 펴냄)로 번역돼 출간됐다.
엘런 교수는 책에서 디자인을 “사람들이 사용하는 예술”이자 “아이디어를 포장해서 그것을 대중에게 알리는 수단”이라고 정의한다. 이어 “글자 폰트에서 가구에 이르기까지 다영한 분야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디자인에 대한 인식과 시각정보에 대한 이해도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으며, 사람들은 자신만의 미디어를 만들고 공유하기를 원하고, 소비자들은 기업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자신들의 목적에 맞는 소비의 흐름에 초점을 맞추기를 희망한다”고 설명한다. 필요한 물건을 스스로 디자인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시도이고, DIY는 단순한 가격 절감을 넘어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그것을 실제로 제작하여 타인들과 공유함으로써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이라는 얘기다.
이 책은 실제 몇 가지 간단한 시각디자인의 기술을 일러주며 명함이나 봉투, 로고, 티셔츠, 전단지, 가방 등을 제작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명함을 만들 때 활자를 선택하는 과정부터 명함에 들어가는 요소, 색상, 소재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종이를 자르고 손으로 정보를 적어넣은 명함이나 고무도장을 이용한 명함, 다 쓴 교통카드를 이용한 명함 등 색다른 방법도 소개한다. 투명비닐을 바늘로 꿰매 주머니를 만들고 그래픽 재료를 밀어넣어 가방을 만들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로고나 캐릭터를 만들어 가방이나 노트, 컵, 티셔츠 등에 적용하는 과정 역시 흥미롭다.
그려라, 그럼 자신이 보일 것이니
디자인 영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손으로 그리는 드로잉과 일러스트다. 손을 움직여 간단하고 정직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으며 응용 범위가 다양하다는 게 드로잉과 일러스트의 장점이다. 이 때문에 드로잉과 일러스트는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문화센터마다 일러스트 관련 강좌가 신설되고, 출판계에서는 일러스트 관련 실용서가 쏟아진다. <일러스트 쉽게 배우기>(김학수 지음, 홀로그램 펴냄), <일러스트 연습 BOOK>(이그루 다이닝 지음, 중앙북스 펴냄), <일상이 즐거워지는 일러스트 그리기>(히로코 사카키 지음, 멘토르 펴냄), <매일매일 일러스트 트레이닝>(사사키 도모에 지음, 아르고나인 펴냄), <손글씨 스케치북>(이지남 외 지음, 웅진웰북 펴냄) 등이 지난해와 올해 출간됐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책은 일러스트레이터 ‘천소’(본명 이정현)가 펴낸 <그리고 상상하다>(길벗 펴냄)다. 10년 넘게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 중인 천소는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4년째 드로잉 스터디를 열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한 가지 주제를 놓고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진행해온 스터디의 노하우와 과정을 모은 결과물이 이 책이다. 다른 일러스트 관련 서적이 사람이나 동물 등을 잘 그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면, 이 책은 색깔을 담아 그림을 그리는 법을 알려준다. 천소는 “일러스트레이터 지망생뿐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서 그림을 그리려는 친구들도 스터디를 찾는다”고 설명한다. “선을 잘 긋는 게 일러스트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머릿속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려고 해요. 그린 사람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예쁘기만 한 그림은 넘쳐나잖아요. 그런 그림보다 상상하면서 그려낼 수 있는 그림을 그리게 하죠. 인형을 만드시는 분은 스터디를 통해 드로잉을 배운 다음부터 새로운 인형을 디자인해내시더라고요. 드로잉을 활용하면 충분히 자기만의 디자인을 완성할 수 있어요.”
소통 도구로 기능하는 디자인
‘스스로 디자인하고(Design It Yourself), 스스로 그려라(Draw It Yourself)’라는 DIY의 새로운 메시지는 소통 도구로서의 디자인을 겨냥한다. 상품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물질적 가치를 지닌 디자인을 자신이 하고픈 얘기를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할 때, ‘디자인의 역습’은 비로소 가능해진다.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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