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단계,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그’의 모습을 하게 된 ‘그녀’, 비밀을 감추고 새로운 세상으로 뛰어든다. 2단계, 그곳에서 만난 한 남자가 있다. 털털하기만 한 그(녀)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남자. 3단계,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흔들린다. 남자는 그(녀)에게 끌리는 자신을 의심하고 또 경계하지만, 그(녀)를 향한 이끌림을 막을 방법이 없다. 4단계, 그렇게 “갈 데까지 가보자”라고 고백하려는데, 그(녀)의 입에서 “나는 여자”라는 (남자 말고 모두가 아는) 고백이 흘러나온다. 자신을 속인 그(녀)에게 화도 나지만 그보다 먼저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5단계, 그렇게 둘은 동성이 아닌 이성 커플로 아름다운 사랑을 완성한다.
이상 ‘남장여자 드라마의 공식’이다. 2007년 을 시작으로 (2008), (2009), (2009)까지 남장여자 코드를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는 매년 한 편 이상 만들어지며 10대부터 30대까지 여성들을 TV 앞으로 불러모았다. 남장여자 드라마 코드의 효과는 크게 두 가지다. 과 처럼 꽃미남들이 가득한 꽃밭 한가운데 화초 같은 여자 주인공을 심어 아슬아슬한 애정 행각을 보여줄 수 있고, 이나 처럼 시대극에서 여성이라는 한계와 제약을 극복해내는 주인공을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로맨스 드라마이자 성장 드라마로서의 동력을 갖고 있다는 게 남장여자 드라마의 가장 큰 매력이다. 게다가 여자 주인공이 남장여자라는 비밀은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극적 긴장감에 성적 긴장감까지 주기에 충분하다.
남성과 여성·노론과 소론의 교차점에 선 경계인
최근 드라마 좀 본다는 시청자의 입에 바쁘게 오르내리는 한국방송 월화드라마 도 남장여자 드라마다. 베스트셀러인 로맨스 소설 (정은궐 지음, 파란미디어 펴냄)을 원작으로 하는 이 드라마는 방영 전부터 남장여자 코드의 로맨스 드라마로 기대를 모았고, 동시에 오해도 받았다. 기대는 ‘원작을 얼마나 달달하게 잘 그려냈을까’에 대한 부분이었고, 오해는 ‘안 봐도 될 만큼 뻔하지 않을까’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웬걸, 기대와 오해 모두 빗나갔다. 은 달달하지도 않고, 뻔하지도 않다. 오히려 생각보다 뻣뻣하고, 생각보다 새롭다.
이 드라마는 남장여자 드라마가 갖는 두 가지 효과이자 장점을 모두 갖추고 있다. 때는 조선 정조 시대. 뛰어난 글재주를 가진 ‘계집’이자 몰락한 양반의 ‘여식’인 김윤희(박민영)는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남동생인 ‘김윤식’의 이름을 하고 남장을 한 채 글을 판다. 그러다 우연찮게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배움을 향한 열정과 기쁨, 또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 완성돼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까지는 신윤복이나 덕만과 다를 바 없다. 문제는 하필 들어간 성균관에 ‘커피프린스’들과 ‘에이엔젤’ 멤버들 못지않은 꽃미남 군단이 가득하다는 것. 여기서부터 김윤희는 고은찬과 고미남의 뒤를 이어 남장여자 드라마의 로맨스 계단을 조심스레 하나씩 밟는다.
남장여자 드라마의 장점들을 한 번에 보여주는 게 전부라면, 오해가 빗나갔다는 평가는 이를지도 모른다. 이 드라마는 여성의 모습을 ‘커밍아웃’하며 원래 있던 그곳으로 돌아가는 걸 목표로 달리지 않는다. 돌아가는 대신 가로지른다. 김윤희이자 김윤식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은 남성과 여성의 경계에 서 있는 남장여자 말고 또 하나의 중요한 비밀이자 정체성을 갖고 있다. 정치싸움에서 밀려나 몰락한 남인 가문의 자손이자 노론을 위협하는 ‘금등지사’ 때문에 노론에 의해 제거된 김승헌의 딸이라는 점이다.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이 치열하던 정조 시대, 성균관 청재(기숙사)는 크게 노론의 자제가 기거하는 서재와 소론의 자제가 기거하는 동재로 나뉘어 있다. 김윤식이 기거하는 방은 소론의 자제가 모인 동재의 방으로 ‘탕평접’이라 불린다. 노론 명문가 좌의정의 아들 이선준(믹키유천)과 소론의 영수 대사헌의 아들 문재신(유아인), 정치 음모에 휘말려 숨진 남인 김승헌의 딸 김윤희가 한방에서 지내기 때문이다. 이 방은 거센 정치세력인 노론에 맞서 군주로서 중심을 지키면서 당색 없이 인재를 고루 등용하겠다는 정조의 신념인 ‘탕평책’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안에서 김윤식을 가운데 두고 세 명이 나란히 누워 잠을 자는 장면은 김윤희가 남성과 여성의 경계에 있을 뿐 아니라 노론과 소론이라는 현실 정치세력의 경계에 있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정조의 아이들’의 성장기
드라마는 끊임없이 신념과 정치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중심에는 항상 김윤희가 있다. 그는 이선준과 문재신에게서 행동을 이끌어내고, 진보의 상징인 정약용에게마저 “안 된다고만 하지 마라”라고 반기를 든다. “서책이 아니라 세상을 읽고 배우며 한 번쯤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김윤희는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봐온 수많은 남장여자 캐릭터와 확실한 차별점을 갖고 있다. TV평론가 김선영씨는 “김윤희는 남성과 여성의 경계 뿐 아니라 기존 질서와 사회의 한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파괴하는 인물”이라며 “남장여자 로맨스와 정조 시대 정치사극이 김윤희를 중심으로 두 개의 축으로 함께 맞물리며 돌아가는 것이 이 드라마가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설정상 뻔한 에피소드를 반복할 수밖에 없어 유효기간이 끝나가는 게 아니냐는 평을 들어야 했던 남장여자물은 뻔한 로맨스를 반복하기보다 경계의 인물로서 남장여자 캐릭터의 정체성에 더 힘을 실어주고 입체감을 준 을 통해 그 영역을 확장했다. 앞으로 남은 분량을 통해 김윤희와 이선준이 ‘남장여자 드라마의 공식’ 4단계와 5단계를 완수해나가겠지만, 그보다 ‘정조의 아이들’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주인공 4명의 성장담이 더 기대된다. 그것만으로도 이 드라마, 좋지 아니한가.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