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한국 주류우파의 계보학

친일에서 기러기 아빠까지, 그건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의 문제’라고 ‘계몽’하는 <계몽영화>
등록 2010-09-15 05:34 수정 2020-05-02 19:26
한국 주류우파의 계보학

한국 주류우파의 계보학

여기 한 집안이 있다. 문상 온 동창생이 노골적으로 부러워하는 집안. 서울 토박이에 중산층이며, 딸은 30대 후반에 서교동 집을 물려받는다. ‘홍대 권역인데, 땅값이 얼마야?’라는 감탄이 튀어나오는가? 영화는 그 감탄의 지점에 질문을 들이민다. 당신이 부러워하는 한국 주류 우파는 어떻게 형성되었고, 무엇으로 사는가?

선물은 라면과 티파니, 전쟁은 고어영화

영화는 현재를 기점으로 1965년, 1931년, 1983년의 시간들을 오가며, 길만-학송-태선으로 이어지는 3대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1965년, 새로 산 양옥집을 소제하는 길만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나선 학송은 ‘중앙국제다방’에 들어선다. 선본 뒤 세 번째 만나는 여교사에게 “이곳 이름이, 과연 멋들어지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학송의 선물 보자기에는 삼양라면과 티파니 반지가 들어 있다. 전쟁 뒤 궁핍을 벗어나기 전, 라면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시대의 과제를, 티파니는 정신적 준거를 외국 영화에서나 본 낭만에 두었던 허영을 상징한다. 둘은 대화가 잘 통한다. 카라얀의 나치 부역을 말하면서 “친일, 친일 하는데, 속사정도 모르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학송에게 맞장구치던 여교사는 자신이 본 한국전쟁의 참상을 고어영화처럼 신나게 묘사하다, “저도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살아남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가르쳐요”라고 말한다. 학송은 힘주어 말한다. “저 나이롱 수출하는 주식회사 다니고, 우리 아버지 저 뒤 봐주시고, 우리 집 서교동에 있고… 우리 결혼합시다.” 학송은 구두닦이를 꾸짖는 일까지 곁들이며 사내로서의 호기를 한껏 뽐내었지만, 고궁 산책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리자 마루 밑에 숨어 와들와들 떤다. 전쟁의 상흔은 근대화를 확신하는 표면의 얼굴이 아니라, 이면의 체화된 공포로 남았다. 흡사 블랙코미디로 보이기도 하는 이 에피소드는 단편영화 (2005)로 먼저 선을 보였고, 전후(前後)로 확장돼 장편 의 포문이 되었다.

학송을 떨게 했던 사이렌 소리는 죽음을 앞둔 학송의 병실 위 민방위 공습경보와 겹치면서 현재화된다. 간경화 진단을 받고도 술을 찾았던 학송은 최근 친일인명사전 편찬 때문에 심기가 상했단다. 어머니는 티파니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할아버지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데… 우리 집이 이만큼 살게 된 것은 모두 할아버지 덕분”이라 말한다. 간성혼수에 빠진 학송은 일본어로 경기중학 교가를 부르다가, 요시미츠라는 이름을 반복해 부른다.

요시미츠상, 1931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근무하는 그는 조선 소작농들에게 소작료를 직접 징수하는 일선 업무를 수행 중이다. 수탈의 최전선에서 조선인들의 저항을 접하며, 소작농 아이들의 낫에 찍히는 악몽을 꾸는 그는 지방 전출을 걱정하는 직장인이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다. 그에게 독립군 친구가 찾아와 ‘인간적 정리로’ 거사 시각에 자리를 피할 것을 알려준다. 흔히 ‘평범한 직장인이자 가장으로서 먹고살기 위해 한 짓을 친일이라 할 수 있느냐’는 말로 비호될 법한 길만이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단지 살기 위해서라면 그 자리를 피하는 게 옳았겠지만, 그는 친구를 밀고하고 그 대가로 가산을 일군다.

개발시대의 주역, 학송은 어쩌다가 알코올중독에 빠지게 되었나? 1983년, 서울 토박이 학송은 군부독재 시절을 거쳐 형성된 경상도 출신의 신흥 졸부 세력들이 교회 등을 통해 파벌을 형성하고 자리를 독식하는 것에 상대적 박탈감과 심한 반감을 느낀다. “카라얀도 모르는 무식한 새끼들”과 스스로를 구별 짓기 위해서, 그는 클래식 음악에 몰두한다. 하지만 학송의 행위는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청혼 선물을 쌌던 보자기엔 돈다발이 담기고, 자식들에게는 “변두리에서 빌빌대지 말고, 중심에서 사고하라”는 말을 독재자처럼 해댄다. 아들에게는 비밀 과외를 시키고, 딸에게는 심부름을 시킨다. 최루탄 날리는 골목을 오가며 맥주를 사다 나르고, 카라얀 공연 실황을 녹음하고, 술 취한 아버지에게 구타까지 당하던 딸은 마침내 아버지에게 “왜 때려? 이 알코올중독자야”라며 첫 반항의 일성을 날린다.

멍청아, 그건 이데올로기야!

그 뒤 딸은 현명하고 자유롭게 자기 인생을 살았을까? 대학에서 최루탄도 맞아보았지만, 태선의 삶은 여전히 아버지의 자장 안에 있다. 아버지를 이어 중소기업 사장이 된 오빠 밑에서 근무하는 남편은 노조를 분쇄하라는 오빠의 명령을 수행하기 힘들다. 태선은 아들의 영어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현지남과 연애 중이다. 중간관리자로서 압박을 강요받는 사위의 모습은 흡사 조선인 착취로 힘들어하던 길만의 모습과 겹치고, 혼외정사로 숨통을 틔우는 태선의 모습은 흡사 술로 일탈하고자 했던 학송의 모습과 겹친다. 태선이 아버지의 폭력으로 받은 상처를 분풀이하기 위해 목매달았던 강아지처럼, 남편은 태선 앞에서 목을 맨다. 그러나 태선의 반항이 삶을 바꾸지 못했듯이, 남편의 항거도 미수에 그친다. 그는 다시 오빠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태선의 미국행은 잠시 보류되지만, 아들의 조기유학은 폐절되지 않는다. ‘국제중앙다방’에서 만난 부모의 딸답게, 태선이 여전히 ‘국제’와 ‘중앙’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는 풍자와 회한의 균형을 적확하게 잡아내며, 친일에서 기러기 아빠까지 한국 주류 우파의 계보학을 짚는다. 영화는 이들 역시 억압과 폭력에 포박된 삶이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면죄부를 주진 않는다. 장진 감독의 최근작 이나 단편 (2006)을 보면, 사람을 죽인 해결사나 고문경찰이라 할지라도 ‘인간적으로’ 모두 이해되는 생활인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그리며, 도덕을 문제 삼지 않는다. 는 이러한 ‘감상적 휴머니즘’(?)을 불식하고, 윤리적 각성을 촉구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밖에 살지 못하는가? 이는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의 문제’이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신화’이며, 우리가 욕망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계몽’이다. ‘멍청아, 그건 이데올로기야!’ 부디 몽매에서 눈을 떠라.

황진미 영화평론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