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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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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여자의 자격만 보여줘

여성의 욕망을 인정하는 척하지만, 여전히 ‘바람직한 여성상’에 갇힌
여성 버라이어티 ‘영웅호걸’ , <세바퀴>, <청춘불패>
등록 2010-08-25 21:27 수정 2020-05-03 04:26
여성 버라이어티쇼는 여성들의 ‘실제’ 모습을 보여줘 화제를 모으지만, 이 세계의 바깥으로 가면 영락없는 ‘여자’가 된다. 왼쪽부터 ‘영웅호걸’ , 〈청춘불패〉. SBS 제공

여성 버라이어티쇼는 여성들의 ‘실제’ 모습을 보여줘 화제를 모으지만, 이 세계의 바깥으로 가면 영락없는 ‘여자’가 된다. 왼쪽부터 ‘영웅호걸’ , 〈청춘불패〉. SBS 제공

골드미스가 갔다. 그리고 영웅호‘걸’이 왔다. SBS ‘영웅호걸’의 여자들은 ‘골드미스가 간다’의 여자들과 사뭇 달라 보인다. 그들은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인지도가 높은 출연자만 들어갈 수 있는 ‘잘나가는 팀’에 속하려 하고, 나이와 연예계 경력 중 무엇을 더 쳐줘야 할지를 두고 신경전을 벌인다. 얼핏 ‘왕언니’ 노사연이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홍수아 같은 후배들은 게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이용해 노사연을 은근히 타박한다. 가수 서인영은 동료 가수 나르샤가 SBS 에서 자신에게 부끄러운 에피소드를 공개한 것에 대한 감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골드미스가 간다’는 ‘골드미스’ 연예인들이 조건 좋은 남성과 맞선을 보도록 했다. 반면 ‘영웅호걸’은 그들 내부의 관계에 집중한다. 여성들 사이에도 선후배 간의 기강이 있고, 비슷한 연배에서는 보이지 않는 갈등이 존재한다. 노사연이 자신의 팀에 유리한 게임을 하기 위해 출연자들의 지각을 핑계로 분위기를 잡는 모습은 ‘골드미스가 간다’에서 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 여자들의 역학구도는 외부의 평가에 좌우된다. 그들이 ‘잘나가는 팀’에 들어가려면 바깥에 나가 봉사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야 한다. 그때 이 여성들은 사람들 앞에서 ‘친절 봉사’하는 모습으로 바뀐다. 여성 럭비팀을 위해서는 위문 공연을 하고, 해양경찰을 위해서는 요리를 대접한다.

여자이되 남자가 원하는 여자여야

‘골드미스가 간다’에서 여성은 남성과의 만남과 결혼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기존 여성상’을 보여줬다. ‘영웅호걸’의 여성들은 더 이상 그러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성들은 그들의 세계 바깥에 나서면 원래의 욕망과 성격을 감춰야 한다. ‘영웅호걸’이 봉사활동에 나선 곳이 여성 럭비팀, 해양경찰, 사파리 등 기존의 남성성이 강하게 부각되는 공간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들은 여성 럭비팀과 훈련하면서 체력 부족을 드러내고, 코끼리 똥을 치우며 질색한다. 여성은 남성적인 세계로 나가는 순간 친절하고 연약한 존재가 된다. ‘영웅호걸’은 여성의 실제 모습을 인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그들 세계의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이는 지금 공중파 여성 버라이어티쇼가 여성을 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한국방송 는 여성 아이돌이 모여 농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농사를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서로의 일거리를 두고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그룹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나르샤 같은 ‘30살 언니’는 후배들의 몸매를 품평하며 놀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대민봉사를 나가는 순간 사람들에게 ‘소원을 말해봐’라고 외치는 여성이 된다. 사람들이 원하면 곧바로 춤을 추고, 때론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인기투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아예 군부대에 가서 병영 체험을 한 뒤 군인을 위한 위문 공연에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 는 남성 출연자를 대거 등장시켜 단체 미팅 분위기를 연출했다. ‘영웅호걸’도 그룹 2PM과의 놀이공원 데이트가 예정돼 있다. 여성 버라이어티쇼는 여성들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면서 화제를 모으지만, 그 뒤에서는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웃고 남성과의 연애에 신경 쓰는 ‘여자’가 되는 셈이다.

문화방송 의 변화는 여성 버라이어티쇼의 한계를 보여준다. 방송 시작 당시 는 기혼 여성들의 일상을 가감 없이 털어놓는 토크쇼였다. 하지만 지금의 는 여성 출연자는 많아도 여성에 대해 다루지는 않는다. 대신 중년 출연자들의 좋았던 시절을 회고할 수 있는 퀴즈나 남녀 아이돌의 장기자랑이 이어진다. 중년 여성 출연자들은 남성 아이돌의 개인기에 환호하고, 젊은 여성 연예인은 개인기를 보여주며 남성들의 환호를 받는다. 시청률 때문일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는 지금과 같은 형식이 완전히 자리잡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토요일 예능 프로그램 중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제작진이 여전히 여성의 실제 욕망을 버라이어티쇼 방식으로 풀어낼 엄두를 내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한국방송 의 ‘남자의 자격’은 지리산 종주, 학창 시절로 돌아가기, 직장인 밴드 해보기 등 남자들의 욕망을 ‘도전’으로 풀어낸다. 반면 여성은 그들의 욕망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다. 서인영은 ‘영웅호걸’ 출연자들의 인지도 조사를 백화점에서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만약 백화점의 여성들에게 출연진의 인지도나 현재 이미지를 물어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아니면 서인영에게 백화점에서 정해진 금액 안에서 ‘신상’ 구두를 구매하라는 미션을 주면 어떨까. 이는 케이블 여성 채널의 오락 프로그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하지만 공중파 오락 프로그램은 그들이 기존의 ‘바람직한 여성상’을 전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웅호걸’,, 는 이런 딜레마에 빠진 여성 버라이어티쇼가 낳은 결과물들이다.

남자의 시선과 여자의 본능 사이

이제 제작진은 여성이 남성처럼 그들만의 세계와 욕망을 가졌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을 프로그램의 핵심으로 끌어내지는 못한다. 이휘재가 ‘영웅호걸’과 의 MC이고, 가수 김태우가 의 MC인 건 이 때문일 것이다. 모든 여자와 능글맞을 만큼 유연하게 대화할 수 있는 이휘재는 여성 각각의 캐릭터를 살리면서도 그들을 제작진이 원하는 상황으로 인도한다. ‘예비역 오빠’ 김태우는 ‘걸그룹 동생’들을 인솔하는 역할을 한다. 공중파에서 여성 버라이어티쇼는 남성이 원하는 범위 내에서 컨트롤받는다.

그 점에서 케이블 채널 QTV ()의 접근법은 흥미롭다. 역시 이휘재가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남자 없이는 못 살 것 같은 여자’ ‘연예인으로 안 보이는 여자’ 등을 묻는 설문조사로 여성 연예인의 속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현영은 “난 가난한 사람은 싫다”며 남성의 조건을 따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또 다른 여성은 현영에게 “언니는 남자랑 충분히 놀아봤으니까”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휘재 역시 그들을 이끈다기보다는 더 솔직한 발언을 끌어내는 멘토에 가깝다. 또한 그들은 설문조사의 순위에 따라 나이나 경력에 상관없이 서로 공격하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뭉치기도 한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는 남자의 손을 많이 탄 몸 같다”처럼 선정적인 발언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의 여자들은 남자, 또는 바깥세상의 시선에 신경 쓰되 그 때문에 본성을 숨기지는 않는다. 때론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에서는 출연자들이 그들의 속을 감추고 웃지 않아도 된다. ‘골드미스’일 필요도, ‘영웅호걸’일 필요도 없다. 여자이기만 해도 충분하다. 그 사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때, 여성 버라이어티쇼도 ‘여자의 자격’을 논할 수 있지 않을까.

강명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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