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아름다운 유사국가, ‘아저씨’

원빈이 아저씨로 나오는 영화 <아저씨>…
아동 보호의 이름으로 공권력 남용도 용서하는 정서를 반영해
등록 2010-08-11 22:46 수정 2020-05-03 04:26
이웃 소녀의 유사 아버지 ‘원빈’은 유사 공권력이 되어 잔혹한 폭력을 휘두른다. 이는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는 한국의 국민국가적 무의식의 발현은 아닐까. 딜라이트 제공

이웃 소녀의 유사 아버지 ‘원빈’은 유사 공권력이 되어 잔혹한 폭력을 휘두른다. 이는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는 한국의 국민국가적 무의식의 발현은 아닐까. 딜라이트 제공

범죄조직에 납치된 소녀를 구하려는 ‘아저씨’의 사투를 그린 영화 는 액션의 쾌감과 범죄에 대한 상세한 묘사로 놀라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영화의 무의식이 ‘아동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무리한 국가 형벌권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작금의 ‘국민 정서’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오! 꿈의 나라, 꿈의 아버지

외롭고 가난한 소녀(김새롬)에게 ‘옆집 아저씨’(원빈)는 유일한 친구다. 마약을 빼돌린 엄마와 함께 소녀가 납치되자 ‘아저씨’는 소녀를 구하기 위해 마약을 운반하다 경찰에 검거된다. 하지만 곧 탈출해 일당을 쫓는데, 이들은 마약과 장기 매매를 행하며, 아이들을 납치해 마약 제조, 운반, 수금 등을 시키다 쓸모가 없어지면 장기를 적출하고 폐기하는 악당이다. 한편 경찰은 ‘아저씨’가 군 특수부대에서 특공무술을 연마한 뒤 국가정보 업무를 수행하다가 국제 산업스파이에게 가족을 잃고 세상을 등진 은둔 고수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영화는 아동 대상의 범죄조직과 전직 특수요원의 대결을 그린다. 경찰은 처음엔 그를 수사하지만, 그의 스펙을 알고 난 뒤 그를 쫓으면서도 연민과 존경을 느낀다. 그의 싸움은 사실 경찰을 대리한 것이다. 경찰들이 빙 둘러싼 가운데 ‘아저씨’와 소녀가 포옹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보듯이, ‘아저씨’와 경찰은 보완 관계다. 유능한 전직 공무원이 무능한 현직 공무원을 대리하는 구도에서, 그는 현실의 국가를 압도하는 ‘잠재적인 국가’ 혹은 ‘꿈의 국가’를 재현한다. 의 전직 경찰도 현직 경찰을 대리했지만, 성매매 포주인 그에게 국가의 환영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패) 경찰이었던 전력은 추적 능력의 알리바이일 뿐이다. 그러나 ‘아저씨’는 도덕적 흠결이 없으며, 유사 국가의 자격을 지닌다. 국가에 의해 길러져 국가 기밀을 수호하려다 가족을 잃고, 국제적 범죄조직에 맞서 마지막엔 타이인과 합을 겨루는 ‘아름다운 아저씨’는 ‘아름다운 국가’의 다른 이름이다.

의 연인, 의 부녀

아저씨는 유사 아버지의 성격을 지닌다. 영화는 소녀와 ‘아저씨’가 어떤 관계인지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알려준다. 첫째 아동성애자로 보는 엄마의 시선, 둘째 무관한 존재로 보는 동네 사람의 시선, 셋째 (유사) 아버지로 보는 문구점 노인의 시선이 있다. 영화는 엄마의 도덕성을 낮추고, 노인의 도덕성을 높인다. 엄마는 관능적이고 문란한 존재로 그려지다 변사체로 발견된다. 영화는 엄마를 소녀의 ‘나쁜 환경’으로 묘사할 뿐 그녀의 삶과 죽음을 동정하지 않는다. 소녀를 거지니 도둑이니 욕하던 동네 사람들은 소녀가 그를 아버지라 지목해도 믿지 않았던 것과 달리, 절도를 눈감아준 노인은 그를 아버지로 오인하며 아버지의 도리를 말한다. 영화는 그를 소아성애자로 보는 것은 저열한 오해고, 둘의 관계를 의아해하는 것이 평균적 통념이며, 그를 아버지로 보고 아버지의 책무를 일깨우는 것이 도덕적이라는 입장을 보인다.

유사 국가이자 유사 아버지인 ‘아저씨’와 레옹은 완전히 다르다. 이탈리아계 살인청부업자로, 공무 수행은커녕 글을 몰라 은행 거래도 한 적 없는 레옹은 국가의 외부에 존재하며, 마지막엔 경찰(국가)과 맞선다. 레옹은 마틸다의 연인이다. 조숙한 마틸다는 레옹을 리드하며, 총기를 배우고, 유혹하며, 한 침대에서 잠든다. 이들은 성기 접촉만 없을 뿐 동거 커플이다. 은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하는 남자의 순애보로, ‘정의를 위해 사회악을 응징하는 아버지-국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반면 ‘아저씨’를 움직이는 것은 소녀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연민과 정의감이다. 애정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국화꽃과 납골당으로 아내에 대한 애도가 강조된다. 그의 행동은 가족을 지키지 못한 상처와 분노에 기인한다. 가족에게 했던 ‘한번 안아보자’가 소녀에게 반복됨으로써, 그가 소녀에게 가족을 투사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의 특공무술이 작렬할 때, 관객은 소녀에 대한 연민, 아동 대상 범죄에 대한 분노, 이웃에게 혈육의 정을 투사하는 정의롭고 ‘아름다운 아저씨’의 매력에 도취된다.

가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는 한국의 국민국가적 무의식을 담고 있다면, 는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는 미국의 제국적 무의식을 담고 있다. 크리시(덴절 워싱턴)는 미군의 대테러 임무를 맡아 제3세계에서 폭동 진압작전을 펴던 자로, 모호한 죄의식을 느끼며 멕시코 백인 소녀(다코타 패닝)의 경호원이 된다. 소녀가 납치되자 그는 납치에 연루된 멕시코 토착세력(폭력조직+부패경찰+고위 정부기관)과 복수혈전을 벌인다. 소녀는 “신념을 잃은 수호자, 성 유다”의 목걸이를 선물했다. (세계자본의 수호자인 미군의) 신념을 잃은 그에게 (세계자본의 일부인 멕시코 자본가의 딸이자, 순수·인간애 등 이데올로기를 표상하는) 소녀가 신념을 일깨운다.

용서받지 못할 공권력은 없다

남미의 빈발하는 아동 납치는 양극화 때문이다. 10 대 90의 사회에서 범죄는 일종의 산업이자, 체제를 위협하는 테러나 폭동의 다른 형태다. 영화는 자본에 의해 고용된 용병이면서도, 성스러운 가치를 수호한다고 믿는 흑인 남자의 죽음을 순교자처럼 그린다. 미군 출신 경호원이 백인 소녀를 잃은 슬픔에 제3세계 정부와 민간인을 상대로 성전을 펼치는 는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정부를 범죄집단으로 격하시켜 괴멸시킨 미국의 정서를 대변한다. 그 대극에 가 있다. 미국 보수우파 백인 노동자인 주인공이 한국전쟁의 죄의식을 오롯이 자기 것으로 응시하며 (백인 소녀를 위해 유색인종에게 불을 뿜는 것이 아니라) 유색인종 소년을 위해 자기 몸을 내줌으로써 진정한 속죄와 평화를 이룬다.

‘아저씨’에게 소녀는 ‘다 이기는, 암흑의 전사’ 카드를 준다. 이는 공권력에 대한 위임장이다. 최근 아동 성범죄에 대한 공분으로 형량 강화, 전자발찌, 보호감호, 신상 공개, 화학적 거세 등의 조처가 쏟아지고 있으며, 전자발찌는 살인죄로, 신상 공개는 일반 성범죄자로 적용이 확대되었다. 영화 속 잔혹한 폭력이 소녀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과 원빈의 용모로 모두 용서되듯이, 아무리 무리한 공권력도 아동 보호의 명분과 과학적 이미지로 모두 용서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현실의 아저씨가 원빈처럼 아름답지 않듯이, 현실의 국가도 우리의 열망처럼 아름답지 않다. 과거 사회보호법이 치료의 의미는 사라지고 격리만을 강화시켰고, ‘범죄와의 전쟁’이 시국사범의 탄압으로 이어졌던 역사는 몰라도 좋다. 최근의 민간인 사찰만 보더라도 국가 사법권 강화가 개인과 시민사회에 어떻게 되돌아올지 짐작되지 않는가.

황진미 영화평론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