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데카르트는 꿈에 대해 사유했다. 그는 감각은 확실한 진리를 보증할 수 없음을 입증하기 위해 꿈을 반례로 들었다. 꿈속에서도 생생한 감각을 느낄 수 있지만,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꿈과 현실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데카르트는 꿈은 ‘깨기 때문에’ 현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영원히 깨지 않는 꿈에 빠진다면? 혹은 깼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꿈이라면? 또는 꿈속에서조차 ‘이건 꿈이야’라고 느끼는데 그 인식이 명석판명하다면?
이런 질문을 품은 영화 은 타자의 꿈속에 들어가 무의식에 개입하는 과정을 그린다. 남의 꿈에 들어가는 설정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1984), (2000), (2007) 등에도 나왔으며, 의 꿈 공유 장치가 더 정교해졌다고 보기도 힘들다. 의 뛰어난 점은 꿈속의 꿈, 긴 시간으로 느껴진 잠깐의 꿈, 꿈을 통해 굳어진 확신, 꿈이라는 것을 알아채기, 자는 동안의 신체 자극이 꿈에 반영되는 방식 등 우리가 경험하는 꿈 현상을 음미하며 규칙을 세우고, 그 규칙을 토대로 꿈의 세계를 중층적으로 축조해낸 데 있다. 이는 감독의 데뷔작 의 뛰어난 점이 단기기억상실이라는 소재에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든 규칙을 충실하게 따르며 내적 완결성을 추구한 데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정교한 플롯과 놀라운 시각효과를 통해 재현하는 ‘꿈의 공유’가 뜻하는 게 뭘까? 공상과학소설(SF)적 장치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의 꿈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존재한다. 첫째는 영화이고, 둘째는 정신분석이다.
‘꿈속의 꿈’ 1. 영화로 귀결되는 메타포
영화의 백미는 ‘꿈속의 꿈’이라는 구조다. 코브(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사이토로부터 경쟁사 후계자인 피셔의 꿈속에 침투해 상속받은 회사를 쪼개겠다는 생각을 무의식에 심을 것을 의뢰받는다. 코브의 드림팀은 피셔가 탄 비행기에서 함께 잠들어 피셔의 꿈속에 들어간다. 1차 꿈속에서 피셔는 그들에게 납치된다. 그러나 피셔의 무의식이 방어기제를 작동하고 이게 꿈이 아닐까 의심이 생긴다.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1차 꿈속의 일당 일부가 피셔와 함께 2차 꿈속으로 들어간다. 2차 꿈속에서 코브는 피셔에게 이것은 꿈이 맞고 당신의 꿈이 해킹당하고 있다며 피셔를 속여 3차 꿈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1차 꿈속의 잠든 일행이 탄 자동차가 추락하는 10초 동안은 2차 꿈속의 호텔 로비가 뒤집히는 3분간이고, 이는 3차 꿈속의 설산에서 벌이는 1시간이다. 서로 다른 속도로 시간이 흐르는 우주가 무한소 형태로 중첩돼 있다. 영화는 결국 4차 꿈속에까지 들어가며, 영화 속 현실로 돌아온 뒤에도 그것조차 꿈일 수 있다는 암시를 남긴다. 이처럼 무한히 중첩되는 구조는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소급되며, 결국 메타적 과정을 거쳐 영화라는 ‘꿈의 공장’을 지칭한다. 서로 다른 속도의 시간이 흐르는 우주나 무한소의 개념은 영화의 구조와 매우 닮았다. 영화는 촬영과 편집을 통해 시간을 응축·확장시키며, 스크린이라는 한정된 평면 위에 무한의 공간을 펼치지 않는가.
코브는 꿈의 설계자에게 현실의 물리법칙을 뛰어넘는 공간을 창조하는 작업의 쾌감을 말하고, 동료들은 “기술은 좋지만 상상력이 없다”며 힐난한다. 영화 만드는 현장에서 자주 듣는 말 아닌가. 깜깜한 영화관에 앉아 영화를 보는 행위는 누군가 설계한 꿈을 꾸며, 그들이 주입하려는 메시지를 나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심도록 허용하는 행위와 닮았다.
‘꿈속의 꿈’ 2. 무의식 탐사하는 정신분석의 과정
프로이트가 착목했듯 꿈은 무의식의 극장이요, 누군가의 꿈에 들어가 무의식에 개입하는 것은 정신분석 과정과 흡사하다. 피셔의 꿈에 들어간 코브는 분석의다. 의뢰자인 사이토도 꿈에 동행하는데, 사이토는 피셔의 다른 자아일 수 있다. 아버지에게 증오심이 있는 사이토가 다른 자아를 설득해 아버지를 배신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정신분석이라는 꿈의 탐사 과정을 통해 ‘아버지의 회사를 쪼개는 것이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행위’라는 합리화에 성공한다.
한편 코브는 아내에 대한 죄책감으로 다른 사람의 무의식을 탐사하는 과정에서 번번이 실패한다. 그와 함께 아내를 보고 아내의 문제를 듣는 설계자는 코브를 상담하는 분석의다. 코브는 아내와 함께 꾼 꿈속에서 깨어나기 위해 아내에게 심은 죽음 충동 때문에 아내가 자살했다고 한다. 아내와 함께 꾼 꿈은 다름 아닌 신혼의 단꿈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단꿈에 머물길 원했으나 남편에 의해 깬 뒤 사랑 없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자살했고, 그는 아내에 대한 죄의식으로 옭아매인 자신을 수배자로 느낀다. 그 역시 분석의에게 아내에 대한 죄의식을 털어놓고 신혼의 단꿈 속에서 충분히 오래도록 사랑했다는 자기 합리화에 성공해 수배자 상태를 벗고 집에 돌아온다. 그러나 꿈임을 알리는 팽이가 돌고, 그를 마중해 집까지 인도한 아버지는 지나치게 인자해 보인다. 이 역시 꿈이요, 아버지와의 관계는 환상에 의해 덧칠된 것이리라.
영화는 현란함 속에서 가르침을 준다. 현실임이 분명하다고 느끼는 나의 지각 속에는 (영화 보기 같은 장치를 통한) 타자의 이데올로기와 (꿈 작업, 방어기전, 신경증 같은 장치를 통한) 내 무의식이 펼치는 환상이 존재한다. 생각하는 내가 나인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황진미 영화평론가
한겨레 인기기사
한덕수 권한대행 탄핵정국을 ‘농단’하다
[단독] “국정원, 계엄 한달 전 백령도서 ‘북 오물 풍선’ 수차례 격추”
얼큰하게 취한 용산 결의…‘나라를 절단 내자’ [그림판]
여고생 성탄절 밤 흉기에 찔려 사망…10대 ‘무차별 범행’
[단독] 권성동 “지역구서 고개 숙이지 마…얼굴 두껍게 다니자”
끝이 아니다, ‘한’이 남았다 [그림판]
‘아이유는 간첩’ 극우 유튜버들 12·3 이후 가짜뉴스·음모론 더 기승
받는 사람 : 대통령님♥…성탄카드 500장의 대반전
육사 등 없애고 국방부 산하 사관학교로 단일화해야 [왜냐면]
‘김예지’들이 온다 [똑똑! 한국사회]